연중 제 32 주간 금요일. 지혜 13,1-9; 루카 17,26-37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사람들은 무언가를 믿으려 합니다. 하지만 가르쳐주는 진리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동시에 다른 것도 믿어보려 합니다. 그러다보면 진리들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게 되는데요.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이렇게 정의내립니다. 프로테스탄트의 신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천주교의 교리를 일부러 하나라도 믿지않은 것을 열교(裂敎)라 하고요. 세례 받은 후, 가톨릭 신앙으로 믿어야 할 진리를 완강히 부정하거나 완고히 의심하는 것을 이단(異端)이라 하고요. 교계제도를 불순명하여 따르지 않고 공동체를 이탈하여 교회 구성원과 친교를 거부하는 것을 이교(異敎)라고 합니다. 이렇게 열교, 이단, 이교가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주님께서 메시아로 오신 것을, 구원자로 오신 것을 거부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라고 나옵니다. 사실 사람이 구원에 이르려면 하느님의 지혜에 도달해야 합니다. 깨달아야 하지요. 하지만 깨달음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어떻게 신이 어떻게 사람의 몸으로 오실 수 있나?’ 하고 의심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말씀이 뒤이어 나오지요. “그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에서 그것들은 신으로 생각하였다면, 그 주님께서 얼마나 훌륭하신 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즉 자기 식대로 믿으려는 태도에서 불행은 찾아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하십니다. 즉 하느님의 심판은 자연스레 어느 사이엔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은 좋아하지만, 정의로운 모습은 거부하려 합니다. 하지만 정의도 진리이신 주님의 모습 중 하나입니다. 사랑을 할 때에도 보고 싶은 면만 하면 안 되듯이, 우리의 믿음도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 부분만, 따로 떼어서 믿으려는 그런 유혹에 빠지지는 않았는 지, 주님의 자비로우심과 정의로우심이 내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