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9주간 금요일. 로마 7,18-25ㄱ; 루카 12,54-59
우리가 그 어떤, 무엇을 한다고 하여도 변함없는 ‘불편한 진실’ 이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이란, 우린 결국 죽음을 만나야 한다는 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봉성체나 요양원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서로가 말은 안하지만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더 살고 싶다’ 는 간절함입니다. 지나가는 말씀으로는 죽음을 운운하시지만, 실제로는 살고 싶어하는 마음의 울림을 바라보며,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에 대한 고민을 만나는데요.
오늘 독서의 바오로의 모습에서 그걸 느낍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긴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바오로마저도 그랬습니다. 더 제대로, 더 잘 살고 싶어하지만 그게 맘대로, 뜻대로, 의지대로 되지 않는 본인을 보며, 실망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이런 말까지 하지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더 살고싶고 더 윤택하길 바라지만,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요. 그 한계를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 예로니모 성인을 그린 그림에는 언제나 성경 옆에 해골이 그려져 있습니다. 또는 그의 동상에도 해골을 안거나, 해골이 발밑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섬뜩하게 여겨지지만, 사실 죽음을 생각할 때, 그 불편한 그림은 우리의 정신을 차리게 해줍니다. 우리는 결국 남아있는 시간동안 뭔가를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복음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그는 고소를 당한 상태이지만 아직 판결이 난 것은 아닙니다. 잘 매듭지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삶도 그런 상태인데요.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해드리면서 여러분들의 잘못을 들으며, 저 개인적인 모습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느끼지요. ‘아~ 나도 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지 못했구나. 나의 기준에 가로막혔었구나. 가졌던 첫 마음을 잃었었구나’ 하고요. 그저 아무 잘못없이, 매끈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보다 우선할 사항은, 남은 시간동안 우리의 사명을 위해 주님을 찾으며 끝까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그런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