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7주간 월요일. 요나 1,1-2,11; 루카 10,25-37
저번 달부터 한 달에 두 번씩, 청년미사가 끝나고 청년들과 함께 기도나눔을 합니다. 기도문 안에는 질문도 넣어놨기 때문에 그 질문에 비추어서 나눔을 하는데요. 어제는 어떤 친구가 이런 말을 털어놓았습니다. ‘옳다는 것은 알겠는데..해야 할 것도 알겠는데.. 하지만 나는 안 하고 싶고.. 누가 해주길 바라고.. 어떻하면 좋을까요?’ 어디 이것이 청년만의 문제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걸쳐진 문제이지요.
오늘 1독서의 요나가 그랬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지만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배에 올랐습니다.” 그것으로 사건이 해결되면 좋으련만, 하느님은 그를 놔주질 않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체험이 시작되지요. 복음에 나오는 율법교사도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그가 몰라서 이런 질문을 했겠습니까? 여기서 얼마 전 복음나눔을 해준 자매님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욥에게 다가온 갑작스런 불행을 보며 이런 얘기를 하였습니다. ‘욥은 그 고통을 겪으면서도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라고 말하고 있는데, 저는 그동안 평일미사도 나오면서 주변으로부터 열심하다는 말도 들었기에 실제로 내가 그런 줄 알았는데 실은 잘못 알고 있었어요. 이 정도면 되는 줄 알았거든요.’ 아마도 그 자매님은 본인이 생각해온 것을 너머서기 시작할 때, 진짜 주님 체험이 어떤 것인지 아시시라 여겨졌습니다. 우리는 대충 여기는, 그 정도 수준에 머물길 원합니다. 그래야 편하다고 여기니까요. 그 정도쯤은 할 수 있다고 여기지요. 그러면서 뿌듯해 합니다. 하지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는 질문에 주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사랑을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으로 끝을 맺지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우리는 이미 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듣도 보던 못한 이야기는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 머물고만 있기 때문에 문제가 풀리지 않는데요. 남들이 봐주는 이미지, 칭찬 등이 어떤 때는 허상일 때가 많습니다. 사실이 아닐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실행하면서 느껴가야 합니다. 그럴 때 변화가 일어나니까요. 우리 모두는 그 변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