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9주간 토요일. 로마 8,1-11; 루카 13,1-9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우분들이 갈등을 빚는 문제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독서를 얼핏 읽으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라는 구절에 집중하면서 이런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이 구절만 보면, 영적인 것은 성스럽고 고귀하기에 이를 따라야 하고, 육체적인 것은 죄로 떨어지기 쉽기 때문에 멀리해야 한다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육적인 욕망이 떠오르면 몸을 채찍이나 편태로 때리기도 하였고요. 어떤 성인은 가시덤불에 뛰어들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생각이 없어질까요? 서기 185년 경 뛰어난 영성가요 성경과 철학의 천재라 불리었던 오리게네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에우세비오의 ‘교회사’ 에 따르면 ‘그는 가르친 바를 실제로 실천하였고, 실천한 바를 가르쳤으며, 그는 가능한 한 학문연구에 몸 바쳤으며, 때로는 단식의 체조를 하고 때로는 아주 적은 잠을 자고, 침대에서 자려 하지 않고 바닥에서 잤다. 복음의 말씀을 생각하여 두벌의 겉옷을 갖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았고, 또 앞날을 걱정하지 말라는 권고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려하였다’ 하지만 이런 열심한 생활에 비해 그의 금욕적 판단은 너무 극단적으로 치닫습니다. 결국 자신의 중요부위를 거세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뛰어나는 학자였지만 성인은 되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가 육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보게 됩니다. 결혼생활을 하건, 독신생활을 하건 성(性)적인 것에서 자유롭기 힘듭니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작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성인이 되기 전, 그동안 우리나라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그분의 유작이 있었습니다. ‘몸의 신학’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그동안 인간의 몸을 죄의식 속에서만 바라보았지만, 실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욕망을 추구하는 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몸과 대화를 하면서 이것을 주신 의도를 헤아려 가야한다’ 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의도의 헤아림은 성령을 통해 더 잘 알 수 있고요. 복음에 나온 포도재배인의 대답인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라는 말처럼, 나의 몸이 말하는 언어가 무엇인지 헤아릴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영과 육은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집니다. 사람들은 이를 다른 것처럼 보지만 실제로 그 어긋남은 서로가 만나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원상태로의 회복을 위해서 말이지요. 우리의 정신과 육체도 서로가 회복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을 잘 돌봐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