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

2015. 8. 28. 오후 9:34:32

글자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 예레 1,17-19;마르 6,17-29

  요사이 10월 첫 주에 오는 추석에 대한 연휴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가족을 만나는 때가 다가오면, 오고가는 선물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란 가족끼리 만났을 때, 어떤 대화를 얼마나 할 것인가?’ 하는 차원일 것입니다. 서로 너무 잘 안다고 여기기에,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가정이 늘어갑니다. 이미 어떤 면에서는 포기했고요. 기대해 봐야 힘들다고 여깁니다. 마치 비무장 지대처럼, 접근하지 않고,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말만 하는 광경이 연출됩니다. 서로 다치지 않게 한다면서요. 가정이 그러할진대 교회도 비슷해 보입니다. 정말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만,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미명하에,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가지고 있던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고자, 더더욱 묻어버리고 깊은 대화를 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려고만 듭니다. 여기서 무슨 변화가 나올 수 있을까요? 만약 하느님도 우리 같은 마음이었다면 인간 세상에 내려와 개입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오늘 예레미아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싫은 소리 하는데 왜 안 떨리겠습니까? 고통스럽지요. 상황이 힘들게 돌아갈 것이 뻔하니까요. 세례자 요한, 자신도 예상했을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 지는 몰라도, 편하게 죽지는 못할 것이라고요. 그에게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란, 바른 소리를 하지 않고 넘기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려웠을 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성녀 대 데레사 탄생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갈멜 수도원에서 새 책들이 번역되고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대 데레사의 나이가 마흔 일곱 무렵, 하느님과의 일치가 절정에 달하고 있을 무렵에, 그녀는 자신에게 대수롭지도 않아 보이는 결점들을 아주 큰 것인 양 고백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장된 표현이나 거짓된 겸손, 소심한 상태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라 오랫동안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닦여나온 양심에서 비롯 되었다는데요. 보통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결점들을 만나면 숨기고 싶어하면서 어떻게든 넘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들킬까봐 두려워하면서요. 하지만 이것을 털어놓았다는 말은 자신과 남들에게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행위일텐데요.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진실된 목소리에 귀기울일 때, 과연 내가 어떠한 사람인 지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