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1주간 수요일. 1테살 2,9-13; 마태 23,27-32
예전 IMF가 터졌을 때, 그리고 경기가 안 좋을 때마다 간혹 듣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들은 걱정없이 사셔서 좋으시겠어요..’ 그런데 이 말이 단순하게 부럽다는 말로 들리기보다는, ‘우리들은 매일 눈 뜨면 사는 게 걱정인데, 신부님 수녀님들은 그런 걱정과는 딴 세상에 사는 듯 여겨진다..’ 는 투로 들려서 가슴이 아프곤 합니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는 ‘내가 왜 신부가 되었을까?’ 를 물어봅니다. 실상 걱정없이 살려고 했다면 아예 시골 골짜기에 들어가 자급자족하면서 사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 많은 삶 중에서 유독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교구 신부를 선택한 이유는, 예수님 스스로가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같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는 제 개인적인 내용인데요. 사실 신학공부를 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신부가 되고나서 세월이 흐른 후 ‘혹시나 세상 일에 물들어 초심(初心)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모나지 않고, 두런두런 사는 게 낫다고요. 하지만 제가 이 생활을 시작한 이유 중에 하나는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상 교구신부님들은 수도원과는 다릅니다. 수도원은 외딴 곳에 모여 살면서 서로를 챙겨줄 수 있지만, 교구 신부님들은 세상 속에서, 유혹과 맞닿으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신자들이 어떤 때는 동지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신부의 판단을 흐리게도 만듭니다. 그러기에 더 홀로, 고독하게 견디며 자기를 바라보는 방법을 터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위선자” 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 어쩌면 그 초심을 잃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오늘날로 따지면 평신도에 해당합니다. 같은 평신도 중에서도 더 열심하려고, 주님의 율법을 공부하고 실천하려고 애쓴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기에 유혹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모두 유혹 때문이었다’ 고 핑계 댈 수만도 없지요. 독서에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처럼 세상에서 사셨던 예수님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속적이라고 하여 세상을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내셨고, 그 안에서 더 선한 것을 분별하셨습니다. 주님의 영과 말씀은 너무나 다양하게 다가오기에 이를 발견하는 힘과 받아들이는 수용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