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0주간 화요일. 판관 6,11-24; 마태 19,23-30
며칠 전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는 우리가 잘 아는, 새, 현기증, 싸이코 등을 만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53년 작 흑백영화인, “나는 고백한다” 였습니다. ‘고백’ 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듯,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한 성당의 관리인이 돈을 구하고자 어떤 변호사를 죽입니다. 괴로운 나머지 자기 죄를 신부님께 고해하지만, 신부님들은 다른 사람에게 고해의 비밀을 발설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용하면서, 그는 자기 대신에 고해 신부님이 살인 누명을 쓰게끔 만들고 있었습니다. 결국 법정까지 선 신부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또 하지도 않습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문득 이사야서 53장이 떠올랐습니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비록 60년이 지난 영화이지만, 신부님들이 실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결국 그 신부님은 혐의를 벗어납니다만, 평범한 신부님의 모습에서 위대한 모습을 보았는데요.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은 평범하지만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기드온은 하느님께 “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라고 이야기 하고 있구요. 복음의 제자들은 낙타 이야기를 들으며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지금상태만 보면 답답해보입니다.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난다’ 라는 말이 통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용은 있는 집안에서 키워지는 세상’ 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흐를 지언정, 주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신분도 그랬구요. 기드온도 볼 것 없는 집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당신은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믿어주시고, 키워내시며, 그들 또한 열심한 삶을 살면서 변화되는데요. 이런 사실을 보며 복음의 이 구절이 떠오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동안 어떤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평범함을 통해 위대함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