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2015. 7. 4. 오후 4:5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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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역대하 24,18-22; 로마 5,1-5;마태 10,17-22

  10여 년의 신부로서 사는 시간의 흐름동안 여러분을 지켜봅니다. 저도 여러분처럼 평신도로서 시작을 하였구요. 이젠 또 다른 선택의 길을 통해 예전과는 똑같지 않지만 여전히 주님의 자녀로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발견합니다. 여러분께서 신앙생활을 어려워한다는 것을요. 며칠 전의 일입니다. 어떤 젊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자기 아이 때문에 미사에 같이 온 모양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성당에 밀어놓고 미사를 참례시켰지만, 정작 본인 자신은 1층 로비에서 영어공부를 하고있는 현장을 보면서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분이 비신자도 아닙니다. 사실 이런 현장을 처음 본 것은 아닙니다. 이미 어린이 미사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범을 보여야 할 부모님들이 자기 신앙의 삶은 가벼이 여기면서, 본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 신앙을 자신들의 아이에게는 권하는 것을 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과연 확신없는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이 신앙은 선조들의 유산을 이어받은 신앙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깨달은 종교가 아닌, 주님께서 알려주시고 먼저 살다가신 분들의 피와 수고로 이어져온 신앙입니다. 우린 기억합니다. 천주교를 반대하던 이 나라가, 이제는 나라의 중심인 광화문 앞에서 천주교의 수장이라는 교황님을 통해 시복식이 열리던 작년을 말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신앙을 왜 지금에서는 이토록 가벼이 여기게 되었을까요? 나의 바쁨과 나의 스케줄로 인해 주일(主日)이 헌신짝처럼 내던져지게 되었을까요? 여기서 저는 두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첫째로 무엇이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두 번째로 나는 어떻게 견뎌내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독서에는 요아스 임금과 유다의 대신들이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우상을 섬깁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요, 하느님을 섬기던 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여기서 그들의 관심이 현재 어디에 집중되고 있는가? 를 보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욕망이 있습니다. 적당한 욕심이나 욕망은 목표치를 이루는데 도움이 되지만, 일단 그 선을 넘게 되면 첫마음을 잃어버리고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순간은 너무나 찰나의 한 순간입니다. 아마 요아스 임금은 권력에 도취된 나머지, 하느님을 오히려 자신의 방해꾼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자신이 뭔가를 하려고 하면 반대하시니까요. 인간의 많은 욕구 중에 제일 많이 거론되는 것이 재물욕, 성욕, 권력욕입니다. 권력은 명예와 같이 따라가기에 하나로 묶겠습니다. 누구는 이런 말도 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2가지만 조절할 수 있다면 대단한 사람이 된다고요.

  그럼 김대건 신부님 대축일을 맞이하여, 신부님들에게 다가오는 유혹이 뭔지 알려드릴까요? 일단 경제력은 보호대상자 수준이고요. 결혼은 못하도록 제도화 시켰으니 일단 법적으로만 보자면 재물욕과 성욕은 불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 남은 것이 명예욕인데요. 사실 신부님들은 지금처럼 남들 앞에서 서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교우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꽤 있어보입니다. 본당을 벗어나면 이런 자리가 있지요. 교회를 대표하는 주교직, 교구의 국장, 학교 교수, 출판사 방송국의 사장, 각 단체의 관장, 원장, 위원장 등입니다. 분명 그 분이 나중에 돌아가시더라도 그 역사의 흔적이 기록에 남겠지요.

  그럼 김대건에게 힘든 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일단 전국구를 맡고있는 유일한 신부님입니다. 유일하기에 누군가와 고민을 나눌 수도 없고요. 박해를 피해 야밤을 틈타 신자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당연히 만성피로, 스트레스 속에서 편안하게 쉬고 싶다는 유혹이 엿보입니다. 게다가 잡혀서 문초를 당하실 때는 온갖 회유작전을 통해 신자들을 잡아가려는 그들의 속삭임을 견디기 힘드셨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솔직히 남들처럼 사는 게 평화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괜히 사서 고생하지 않고, 그들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인간관계 잘 유지하고, 신앙 때문에 분란을 피하는 것이 더 편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한다면 무엇을 만날 수 있을까요? 진정한 개혁과 진정한 평화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린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견뎌야 할까요? 여러분 눈 앞에는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해 볼만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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