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3주일 미사. 지혜 1,13-24; 2고린 8,7-15; 마르 5,21-43
1980년대 초에 개봉한 시리즈 영화이지만, 몇년 전 다시 만들어진 ‘매드 맥스’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보여줍니다. 지구는 이미 사막이 되었고요. 사람들은 살 길을 찾지만 그곳도 역시 황폐해져 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살고자, 서로를 물어뜯고, 약탈하고 죽이기를 반복합니다. 이런 상황이 먼 미래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 지금도 이미 시작되고 있지요. 가난한 나라가 있음에도 남의 집 불구경처럼 여기고 있는데요. 우린 이 현실에서 과연 무엇을 희망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가 아는 부활 신앙을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알아들은 하늘나라란 데는, 육신은 없어진 후, 하느님이 약속하신 불멸의 영혼만이 나중에 거주하게 될, 어떤 장소쯤으로 축소시켜 알아듣는 분이 많은데요. 만약 이렇게 알아들었다면 우리가 살아온 그동안의 시간은 가치가 없는 것이고, 내가 사는 이곳은 고생스런 곳이며, 빨리 이곳을 떠나야만 해방을 맛볼 수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지금은 고생하고 있지만 분명 하늘나라에서 다 보상받을 수 있을 거야.’ 라고요. 하지만 그럴까요?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물론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왔지만, 하지만 그 죽음은 영원한 끝은 아닌, 약속된 부활이 예정된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는 여러 곳에서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예수님을 배려하는 듯 보이지만, 그게 아니지요. 이제 아이가 죽었으니 모든 게 끝났다는 체념의 뜻이 베어있습니다. 여기서 이런 것을 봅니다. “탈리타 쿰” 이란 말에 죽었던 소녀가 일어납니다. 즉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2독서에 나오지요.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균형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균형이란, 본질로의 회복이고 돌아감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늘나라란, 시험을 잘 치룬 아이가 마치 보상을 받는 그런 낮은 차원의 개념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차원이라면 아이는 시험을 치루는 시간을 전혀 기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지금만 잘 넘기자.’ 라고 여길 것입니다.
오늘은 교황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역사상 처음으로 환경문제만을 다룬 회칙이 ‘찬미 받으소서’ 입니다. 아시시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찬가’ 에 나오는 후렴구인, ‘저의 주님, 찬미 받으소서’ 에서 따왔는데요. 태양의 찬가는 우리가 사는 집인 이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시는 아름다운 어머니’ 와 같음을 상기시켜줍니다. 이 회칙에서는 ‘이 누이가 지금 우리에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누이에게 맡기신 재화를 무책임하게 사용하고 남용하여 해를 입혔기에 우리의 양심이 피조물에 저지른 죄를 인정하면서 지구의 물, 땅, 공기, 생명을 오염시킨 죄를 각성하면서 다시금 당신이 만들어주신 자연에 대한 고마운 자세를 표현해야 한다’ 는 것인데요.
우리가 아는 주님은 처음부터 생명과 사랑을 말씀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우린, 우리의 욕심으로 세상을 오염시켰고, 소비하였고, 그러면서 죽음이 들어왔는데도 그것을 문제시 여기지 않았음을 반성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마스크를 끼며 이렇게 고생하고 있고요. 결국 우리의 선택으로 인해, 지구와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멸망으로 몰고 갈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반대로 우리의 선택으로 다시금 생명으로 가득한 곳을 만들 수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까? 당신의 은총을 받은 우리라면, ‘그저 나 하나 잘 살고 보자’ 는 차원이 아니라 주님의 지혜 안에서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삶으로 옮겨가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