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가롤로 르왕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토빗 3.1-17;마르 12,18-27
인간 세상에서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문제가 ‘고통’에 관한 문제일 것입니다. 모든 종교마다 이것을 다루고 있고요.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도 그것을 다루고 있는데요. 하지만 이것을 다루는 방식은 좀 다르지요. 깨닫는 종교는 이런 차원으로 다가갑니다. ‘자신이 지고 있는 짐의 무게를 깨닫는 순간, 바로 내려놓고 편히 쉬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자기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묵묵히 걷기를 바랍니다.’ 어느 편에서는 우리와 비슷합니다. 버거운 ‘십자가의 고통’ 이야기를 하니까요. 하지만 이 무게감을, 홀로 지고 가야한다는 사실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이 사실을 아시기에 당신은 마태오 복음 1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나에게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겠다.” 이미 당신도 우리의 한계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음을 알고 계신 것이지요.
오늘 독서에 나온 토빗은 너무 괴로워 울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제 당신께서 저를 좋으실 대로 다루시고 제 목숨을 앗아가게 하소서. 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라구엘의 딸 사라도 그동안 일곱 남편을 얻었지만 다 죽어버리는 통에 너무 슬픔이 가득하여 “위층 방으로 올라가 목을 매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힘든 사안은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너무 높은 데에서 살게되면 이런 아픔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지요. 복음에서 질문을 한 사두가이들은 권력층의 핵심들입니다. 너무 위에서 살다보니 남의 아픔을 공감할 능력이 없어졌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세운 규칙이 어그러지지 않기 위해서 살 뿐이지요.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반응하시잖습니까?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그럼 뭘 좀 안다는 우리는 어때야 할까요? 우리가 기도를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신(新)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더더욱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의지하는 속에서 약속된 것을 얻을 수 있는 희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알렐루야에서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하셨잖습니까?
기념일을 맞이한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비록 배교를 강요하는 세상에서도 이를 증거하고 드러내면서 ‘주님 제가 할 도리는 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당신께서 알아서 해주십시오’ 라는 의탁의 자세가 비롯될 때 그들은 영원한 삶을 보상받는데요. 우리들은 하느님 앞에서는 항상 살아있는 이들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늙고 병들고, 죽었다고 여길 지라도 당신 앞에서는 항상 살아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