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8주간 수요일. 집회 36,1-22;마르 10,32-45
조선시대의 숙종 임금이 이런 말을 했답니다. ‘나이 오십에도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선비의 이름만 꿰차고 있는 사람이 나는 무섭다. 작은 재물을 앞에서 흔들면 금세 자기 뜻을 저버리고 못하는 짓이 없기 때문이다. 세운 뜻이 없이 명색만 지닌 것이 나는 두렵다. 실속도 없이 체면치레나 하는 사람이 나는 무섭다.’ 고요. 이런 사람들이 어디 그 시대에만 있었겠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이지요. 실력도 없으면서 허세만 가득차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하다가 남의 아픔은 보지않고, 자신의 사명감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 말입니다.
어제도 그런 것을 느끼는 하루였습니다. 이냐시오 묵상나눔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5월 한 달은 주님의 수난의 체험을 같이 느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들려오는 체험들은 ‘이런 예수님이 참 싫다. 무능한 이 방법을 꼭 택했어야 했는가?’ 하는 분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노는 좋은 징조이지요. 왜냐하면 자신의 현주소를 보게 해주니까요. 많은 신자들이 말로는 안 할 뿐이지 사실 이런 분들 많습니다. 우리 교우들이 구역모임마다 하는 복음나누기 7단계의 문제점이 있는데요. 문제점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을 선택하지만 그 구절을 가지고 예수님의 마음을 바라보기보다는, 자신의 현 상황과 끼워 맞춘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니 나눔은 산으로 가지요. 그러면서 자신의 방황은 계속되고요. 숙종임금이 두려워했다는 점이 이해가 갑니다. 정작 해야 할 바를 하지 않고 다른 곳에만 신경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배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인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대답은 “할 수 있습니다.” 하였지만 그 행동은 훨씬 뒤에나 가능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맞닥뜨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당신의 구원방법이 우리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허나 그렇게 행할 때, 내가 만나지 못한 측면을 만나는데요. 내가 원하는 것만 만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상되는 범위만을 받아들일 때, 그 신앙은 뻔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독서 말씀을 마지막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주님, 당신 말고는 어떤 신도 없다는 사실을 저희가 아는 것처럼 그들도 알게 해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