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대축일.

2015. 5. 23. 오후 11: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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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대축일.

  마태오 복음 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복음에서 빛을 받은 이는, 그 빛을 모든 이가 볼 수 있도록 하기위해 등경 위에 놓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그 빛을 갖게되면 대다수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 지 아십니까? 그 빛나는 촛불 위에다가 커다란 됫박을 덮어놓습니다. 왜냐하면 나만 봐야하니까요.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될까요? 자기에게만 집중하다가 결국 덮어놓은 됫박 안에 공기가 없어져서 불씨가 꺼지고 말지요.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길 원한답니다. 왜요?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겠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돈이 모이면서 생각이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모으는 재미로 살다가, 돈이 모이면 쓰는 재미로 살지요. 허리를 졸라매기 보다는 일단 대출을 받더라도 지출하는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짜 부자들의 재미는, 돈이 쌓이는 재미로 삽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 12장에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이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며 혼자 궁리하다가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두어야지.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으니 남이 보일 턱이 없지요. 나누기보다는 그저 모으는데 열을 올리는데요. 왜요? 재밌으니까요.

  성령강림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의 세 가지 직무입니다. 바로 사제직, 예언직, 왕직 즉 봉사직입니다. 사제직은 성사생활을 하면서 얻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주님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예언직이나,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사회 문제 해결에 힘쓰는 봉사직에는 소홀한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득실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교회가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종교다워야 한다는 논리를 펴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하느님의 논리대로 잘 돌아간다면 당연히 교회는 가만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지요. 나이든 노숙자의 죽음은 뉴스가 되지 않으면서, 주식시장에서 주가가 2포인트 하락하는 것은 보도하는 세상이라면, 과연 이 곳이 사람이 살만한, 하느님이 계실 곳을 마련하는 세상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서로에 대한 무관심, 불평등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사는 사람은, 나 개인이 세상의 노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갈 때, 아는 사람을 언제든지 버릴 수 있고 내칠 수 있다고 여기는 곳이라면, 당연히 교회가 목소리를 내야 하겠지요. 그런 일은 누구도 바라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령의 오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힘이 내리시길 기도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힘만으로 되지 않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은 어떻게 이야기 합니까? 예를 들어 경제 교과서에는 낙수이론을 이야기합니다. ‘정부가 재정을 투입하여 대규모 사업을 벌여 대기업과 부유층이 부를 늘려가면, 자연히 그 혜택이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 돌아간다는 이론이지요. 하지만 결과는 어떻습니까? 앞서 소개해드린 복음의 비유와 같지 않습니까? 부자는 그 물을 흘려 내리기보다는 자기 창고만 더 늘릴 뿐입니다. 그러면서 우린 단순한 구경꾼으로 전락합니다. 목소리를 내지도 않고, 분노는 하지만, 뒤에서만 욕할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지요. 우리가 잘 아는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비슷해 보입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을 보았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레위인도 사제도 다 비켜갈 뿐입니다. 이 비겁한 현장은, 상황만 다를 뿐 이미 우리 안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대축일 맞이하면서 우리가 받게 될 성령이 그저 교회 안에서만 머물게 해선 안됩니다. 그것은 성령을 욕되게 만들고 축소시킬 뿐입니다. 상황이 안 좋은데도 많은 이들이 어려움에 빠져있는데도 침묵을 통해 묵인을 하는 꼴은 우리가 경멸하는 그들에게 무언의 박수를 보내는 꼴과 같은데요. 우린 내가 받은 성령이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 지를 봐야합니다. 체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 목소리를 선포할 때, 우리는 변화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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