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4주간 화요일. 사도 11,19-26;요한 10,22-30
예전보다 뭔가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사실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 상황이 좋다.’ 라는 차원에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우리들의 몸부림이 보이기에, ‘나아지고 있다’ 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예전보다 사회는 소란스러워지고 있고, 뭐 하나 진취적으로 나아간다는 현실은 보여지지 않습니다. 희망보다는 ‘너희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라는 낙담이 먼저 드니까요.
오늘 독서의 상황도 그랬습니다. 스테파노 성인이 죽고 난 다음, 믿던 이들이 흩어집니다. 일단 살기 위해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갑니다. 분명 힘든 사항입니다. 주님을 믿었기에 얻은 보상이라고는 고작 ‘피난’ 이라는 사실이 황당할 수 있습니다. ‘이게 왠 고생이야?’ 싶지요. 이집트를 탈출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민수기 11장에서 푸념을 합니다.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처럼 어쩌면 믿지 않았던 그 시절을 오히려 그리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완전한 타지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사이도 없이 새로 만난 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고, 성령에 의해 자신을 다시금 세워나갑니다. 복음에도 사람들이 당신이 누구냐? 하는 질문에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고 하십니다.
예전에는 말만 그럴듯하게 하면 대충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빠른 정보와 속도감으로 인해, 말로만으로는 되지 않는 세상이 되어갑니다. 그러기에 대부분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다행인 것은, 예전보다 개방적이 되어가면서 여러 부패와 감추고 싶었던 것이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드러남’ 이 항상 상쾌하지만은 않습니다.감추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들의 본능이니까요. 하지만 그 밑바닥을 인정할 때, 그때부터 새로운 세계는 시작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실천적인 행동이 지금의 나를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주님처럼 어떤 일을 해나가고 있습니까? 위기에 봉착했을 때 어떤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까? 예전 성경의 인물들이 이겨나갔듯이 우리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