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주일. 이사야 50,4-7; 필리 2,6-11; 마르 14,1-15,47
오늘은 주님 성지주일이고요. 이미 많은 말씀을 들으셨기에 짧게만 언급하겠습니다. 예전 이 말씀을 들을 때는 여러 등장인물의 심경을 바라보았지만 오늘은 예수님의 침묵이 보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이 자들이 불리한 증언을 하는 데 어찌된 일이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무신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저로서도 솔직히 따라 하기 힘든 행동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억울한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요즘처럼 남에게 지는 것 싫어하고, 가만히 있으면 바보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뭐라고 항변을 해야 속이 시원할까요? 사실 주님께서 행하신 ‘가만히 있는 방법’은 참으로 답답해 보입니다. 게다가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겠지요.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이 어떤 방법을 씁니까? 힘을 가지려 들거나, 힘이 없으면 권력에 빌붙거나, 명예를 얻으려 하면서, 단체 내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세력을 행사하지요. 그런데 당신은 그와 다르게 할 것임을 시사하셨습니다.
1독서에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 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2독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이런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하셨습니까? 짓밟고, 뒤에서 욕하고, 깔아뭉개고 했지요. 그래서 뭐가 남았나요? 결국 나를 해치는 행위였습니다. 그게 쾌감인 줄 알았는데, 결국 우린 자해(自害)행위를 한 꼴입니다.
솔직히 저는, 아직 당신의 대응방식의 의미를 다 헤아리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들었습니다. ‘침묵은 상대방이 스스로 알아듣게끔 만드는 방식’ 이라는 사실을요.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어딘가에 집착한, 병든 사람과도 같습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몽둥이도 약이 못됩니다. 그들 스스로 ‘이런 방법도 있어?’ 하면서 놀라야만 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기 순교자들을 죽이려고 로마 콜로세움 광장에 사자를 풀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리저리 도망가야 정상이고 재미가 있는데 서로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답니다. ‘대체 쟤들이 믿는 종교의 정체는 뭐야?’ 그러면서 호기심을 가졌다는데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한 이는 다름 아닌 신자도 아닌, 백인대장이었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주위의 평범한 이웃들을 만나면서 사랑을 하기에 앞서서, 먼저 어떻게 그들을 인정하고 계시는지요? 일단 인정을 하고, 차원이 다름을 이해할 때, 사랑도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