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금요일
‘천주교’ 라는 이름을 들으면 여러분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일단 좋지요. 시대마다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70년대는 민주화를 위한 독재 항쟁의 선봉으로 보였구요. 얼마 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오시는 통에 특수를 누렸습니다. 사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선배님들의 많은 수고와 노고 덕분이었습니다. 순교자들과 신앙의 선배님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천주교 신자들의 인식도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종교’ 였지만, 언젠가부터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이 믿는 종교처럼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지역에 비해 서울 신자가 많고요. 그 중 강남, 서초권에 신자비율이 높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없어도 거기 사는 이들과, 같은 라인을 형성하고 싶어합니다. 그러기에 의구심이 듭니다. 과연 하느님에 대해, 구세주 예수님의 정체에 관해 ‘과연 얼마나 알고 믿는걸까?’ 라고요.
이사야서에는 구세주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사람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 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그런 수난을 받으신 예수님에게 빌라도는 말합니다. “자 이 사람이오.” 지명된 그 사람은, 가시나무를 쓰고, 온 몸은 살점이 다 떨어져 너덜너덜합니다. 그럴듯한 분위기? 후광이 보이는 아우라? 그런 것 없습니다. 성화에 나온 멋있는 풍채는 더더군다나 없습니다. 구세주라고 보여진 이 분은, 베드로나 유다,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가고 싶고, 같이 엮이다가는 왕따 당하기 딱 알맞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이 분을 따르고 싶습니까? 사실 인간적인 다짐만으로는 신앙을 지속시키기 어렵습니다. 노력 갖고도 안 됩니다. 우린 그동안 노력을 안 해본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럼 노력도, 다짐도 별 수 없다면, 그 땐 어떻게 해야 될까요? 사회에서 배운 방법이 안 먹힌다면 내가 무엇을 해야할까요?
오늘 독서 마지막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해 빌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비는 삶, 기도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들과 좀 다릅니다. 기도하는 이들은 지금 당장에 모든 것을 걸지 않고, 더 먼 미래를 바라봅니다. 자신을 희생시키면, 하늘이 그것을 보고 감동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몸과 마음은 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상도, 모르는 사람은 그저 흉터로 보겠지만, 그 상처로 모두가 살아났다면 이제 그것을 더 이상 흉터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린 이미 그분의 실천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나도 그분처럼 살기 위해서 항상 주님께 간구하는 삶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