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세례 축일

2015. 1. 10. 오후 2: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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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세례 축일. 이사 42,1-7; 사도 10,34-38; 마르 1,7-11

  여러분의 사랑은 구체적입니까? 아니면 막연합니까? 사실 사랑이란 단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그 단어를 제대로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우선 보이지 않으니까요. 만져지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대다수 분들이 뜬구름 잡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Bonum est concretum. ()은 구체적이다.” 요한 1318절에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아퀴나스 성인도 말했지만 즉 사랑은 구체적이라는 말인데요. 제가 왜 갑작스럽게 사랑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예수님 자체가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죄 없으신 주님께서 일부러 죄 사함을 받는 세례를 통해 당신께서 우리와 같아지시려 하십니다. 같아지려고 하신다 는 말 속에서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려는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 사랑의 속성에는 순수함이란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야만 사랑이 어떤 정체인지를 알 수 있고, 그래야만 세례를 통하여 얻고 느낄 수 있는 본질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올바르고 제대로 행동하는 것은 아닌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한계입니다. 이미 냉담하는 분들부터 주일만 성당 오시는 분들, 평일미사는 나오지만 이웃과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사는 분들에 이르기까지, 이미 세례를 받고 난 후 그 때의 첫마음은 어느샌가 사라졌거나 변질된 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린 나 자신을 들여다 보고 나를 다시 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밖에 없는데요. 이제부터 여러분께 나를 다시 세울 방법을 몇 가지 알려드립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이 막연하지 않게 제대로 된 선택을 잘 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 방법은 이냐시오 성인이 쓴 방식인데요.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첫째. 제일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입장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나를 통하여, 사람을 통하여 옵니다. 그러기에 내가 내리는 모든 선택과 결정은 신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결정에 오염이 묻어있지 않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겠지요. 둘째. 그런 믿음이 시작되면 의문이 생깁니다. 내가 잘 한 선택인가?’ 하고요. 여기서 나에게 이렇게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선택한 방향과 방법이, 하느님 보시기에도 옳은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는가?’ 하고요. 즉 욕심과 다른 것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올바른 것을 선택할 줄 아는 근본적인 방향전환이 필요합니다. 당장에는 위험해 보이더라도요. 하지만 대다수 분들이 여기서 멈칫거리다가 자기 욕심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자기가 당장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이제 방향 전환이 되었다면. 셋째로, 나는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즉 규칙과 선택이 주는 안락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넷째로 그 안락함을 맛보게 되면 추진력이 생깁니다. 그 추진력은 더욱 더, 더 나은 것을 향한 갈망입니다. 다섯째로 그 추진력과 갈망은 예수님의 말씀하신 복음대로 사느냐? 아니면 반대로 사느냐?’ 에 대한 갈림길에 이르게 됩니다. 갈림길은 당장에는 위험해 보입니다. 게다가 잘못된 결정은 우리의 삶을 퇴보시킵니다. 그러기에 최선을 다하는 결정을 내려야 하고요. 여섯째로 그 결정은 전체적이어야 합니다. 즉 머리와 마음, 생각과 느낌이 함께 동반되는 결정이어야 합니다. 그런 결정을 내렸을 때 직접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확신의 느낌과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이 6가지가 가능하려면 평상시에 연습을 계속해야 합니다. 사실 연습의 기회는 그동안 충분히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것을 사면 지금 당장만 좋을 지, 아니면 나중에도 좋을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모든 결정에는 두려움이 동반됩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두려움은 우리를 감옥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해방감도 가져다 줍니다. 마치 베드로가 물을 걸을 수 없는 것처럼 여겼지만 당신의 부르심에 몇 발자국이라도 물을 걸었듯이 말입니다. 그것을 우리도 해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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