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3주간 수요일. 창세 49,1-10; 마태 1,1-17
어제 어떤 단체분들과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어떤 어머니께서 본인의 체험을 얘기하셨습니다. 아마도 어머니라 그런 지, 자녀에 관해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본인도 냉담을 했었는데 그러다가 아이가 고3이 되었고, 그 때 수험생을 위한 기도를 통해 다시금 신앙의 불이 지펴져 참 기뻤다면서, 본인이 느꼈던 좋았던 체험이 잘 전달되고자, 단지 100일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미사 전, 1년 내내를 ‘자녀를 위한 기도’ 를 하자는 의견을 밝히셨는데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을 위한 마음으로 신앙의 불이 다시금 켜졌지만, 한편으로 어머니 본인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 지는 살피지 못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 우린 자녀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여깁니다. 그러면서 뭔가 자녀를 통해 바라는 것을 투사시키고 얻지요. 하지만 그 가운데서 받았다는 선물을 통해, 진정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요?
복음은 모두가 다 아는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입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반복적인 나열방식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덧없이 보이는 출산의 설명 안에서 평범함 속에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는 현장을 느끼셨는지요? 그들이 했던 생명 연장의 시도가, 실은 나중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사실이 보이시는지요? 사실 이런 족보의 나열이 답답해 보이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게다가 이를 한꺼번에 설명해주지도 않기에 더 모를 말 같아 보입니다.
여기서 우린 내가 알고, 갖고 있는 시간대에 멈춰 버리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떤 계기로 인해 내가 성장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여정중에서 그 분이 하신 일을 바라볼 때 그 체험이 뭔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1독서에서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이야기 합니다. “뒷날 너희가 겪을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일러주리라.” 그들이 겪을 일이란, 나중에 열 두 지파가 겪을 운명이었습니다. 과연 아들들이 그 말을 들었다고 해서 다 알 수 있었을까요? 물론 아니지요. 그들은 나중에야 깨닫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행하신 업적을 알고나서야, 아브라함이 한 일이 뭔지 알 수 있듯이요. 그러기에 필요한 자세란, 당장 답답하거나 좋은 느낌을 받아도 속단과 조급증을 피해야 합니다. 내가 겪은 좋은 경험이 꼭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지는 않습니다. 단지 거쳐가야 하는 과정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기에 내가 받은 체험과 은총에 모든 것을 다 걸기보다는, 이를 통해 ‘내가 무엇을 봐야할까?’ 를 살필 때, 내가 주님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길 바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