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3주간 금요일. 판관기 13,2-25; 루카 1,5-25
많은 분들이 ‘제가 신앙심이 없어서요.’ 라고 말씀들을 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을 만날 때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린 기억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밑에 있던 사람이 소리칩니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이럴 때, 정말 과감히 당신께서 내려오셨다면 그 사람이 믿을까요? 아니지요. 오히려 그 당시에는 신기하거나 두려워 할 뿐, 믿음으로까지 옮겨가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은 그런 게 아니니까요. 믿음은 내가 아는 수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린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리야는 천사를 만납니다. 천사는 이제 벌어질 일을 미리 알려줍니다. 하지만 즈카리야는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에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지만 많이 못 배운 오늘 독서의 삼손의 어머니 마노아는 “하느님의 사람이 나에게 오셨는데 그 모습이 하느님의 천사 같아서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 지 묻지도 못하였고 그분도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허나 마노아는 이를 받아들였기에 이내 기쁨을 얻었고, 즈카리야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을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잠시 말을 못하는 벌을 받지요. 물론 그도 나중에 현실을 보면서 정상으로 돌아옵니다만 이런 상황을 보면서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먼 길을 돌아가는 경우를 보는데요.
물론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배운 것에만 맴돌면, 거기에 갇히면, 즉 상식의 선상에 갇혀버리면, 내가 만나지 못한 또 다른 차원을 만나기 힘들어버리는데요. 예전 성 안셀무스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즉 믿음이란 것은 이해한 다음 수준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기 시작하면서 움직일 때, 이해가 되어가는 수준이라는 것인데요.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살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