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8주일 미사. 이사야 25,6-10;필리피 4,12-20; 마태 22,1-14
우리는 자유롭기 위하여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자유를 더 잘 누리고자 신앙생활이란 것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주는 삶이 그다지 자유롭지 않으니까요. 먹고 살기 위해서라지만 결국 어느 곳에 메어있어야만, 즉 학교나 직업이라는 소속감을 가져야 살 수 있고요. 어느 단체에 들어가야만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지요. 신부 개인으로는 힘이 없지만, 교구소속 신부이기에 목동성당에도 와 있는 것이고, 사목이란 것도 합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나면 또 어떤 곳으로 가겠지요. 어느 곳에 메어있다는 말은, 한편으로는 소속감을 통해 뭔가 할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거기에 묶여 살 수 밖에 없는 한계성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무슨 소원 따위를 빌려고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야 내가 살고 있는 이유를 아니까요. 하지만 대다수의 교우들이 거기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예가 있습니다. 어떤 남성 교우와 면담을 했습니다. 본인이 어떤 회사를 세워서 사장님으로 있는데 앞으로가 막막하다고요. 물론 요즘 경기가 안 좋고, 여러 가지가 맞물려야 하기에, 혼자서는 하기 힘든 것이 사업입니다. 다른 업체의 움직임도 봐야하고, 회사 사원들의 상태도 봐야하고, 그리고 나아갈 방향도 봐야 하니까요. 여기서 대다수 사장님들이 이런 오류에 빠집니다. ‘본인=(equal)회사’ 라고요. 뭐 당연하게 보입니다. 본인이 어렵게 회사를 설립했고, 자식처럼 키우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회사가 본인 자체는 아니지요. 그저 내가 세운 하나의 산물입니다. 나는 세월이 흘러 죽겠지만, 회사는 운영만 잘 된다면 백 년이 넘게 살 수 있겠고요. 그래야 남아있는 사원들도 살 수 있고, 소비자도 혜택을 받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분들이 본인과 회사가 동일하다고 여기는 통에, 여기서 자유롭지 못함을 봅니다. 신앙으로 따지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지요.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빌린 인생’ 이라고요. 빌렸기에, 나는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다수의 분들은 빌렸다기보다는 온전히 자기 것이라고 여기기에, 이 삶을 본인 자신에 의해 답답하게 막히게 만들고 있는데요.
오늘 복음에 하느님은 “종들을 보내어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여라” 하시면서 원래 혼인잔치에 오게 되어있던 명단의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하지만 명단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여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즉 자기 삶에 메여서, 정작 자기가 해야 할 바가 뭔지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부르지만 그 중에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아서 쫓겨나는 사람도 나옵니다. 이 복음을 들으면서 좀 억울하다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초점은 이것입니다. 비록 종교가 다르거나, 예정에 없던 초대였더라도 평소 자신을 잘 돌보았느냐? 아니냐? 하는 점입니다. 자신을 잘 돌본 사람이라면 어떤 상태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것이니까요. 결국 우린 같은 곳으로 갈 것입니다. 바로 ‘죽음’ 이지요. 하지만 대다수가 너무 멀리 있는 얘기거나, 남 얘기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정작 ‘그 날’ 이 다가왔을 때, 거부하거나 인정하지 못하여 힘들어 하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하지만 매일 매일의 삶을, 깨어남과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2독서의 말씀처럼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나의 삶의 주인은 여러분 자신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 것이라면 생명도, 죽음도, 직장도, 학교도, 여러분 계획대로 흘러가야 하겠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때가 되면 누구든지 밥숟가락을 놓고 떠나야 하며, 그 때가 되면 원치 않더라도 이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야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속된 2년이 지나면, 더 있고 싶어도 가야하겠지요. 원래부터 제 것이 아니니까요. 이런 마인드가 되어 있을 때, 우린 1독서의 말씀처럼 살 수 있습니다. “그 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님을 받아들일 때, 당장에는 그로인해 죽는다고만 여기겠지만, 또 다른 문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옮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삶이겠지요.
사랑하는 목동 본당 교우 여러분~
버릴 때 채워진다는 말은 꼭 불교나 노자사상만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영원히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 영원한 삶은, ‘원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가?’ 를 바라볼 때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