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3주간 수요일. 1고린 7,25-31; 루카 6,20-26
오늘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리셨습니까? 도덕경 70장에는 이런 말이 실려 있습니다. ‘나의 말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쉬운데도 천하에 잘 아는 자도 없고 잘 행하는 자도 없다. 말에는 근원이 있고, 통솔자가 있거늘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하니 나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솔직히 많은 교우분들이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기 힘들어 합니다. 도덕경 얘기 나왔기에 말씀드리면, 도덕경 52장에 힌트가 나옵니다. ‘사물을 보되 자기와 동떨어진 대상으로 보지 말고 그것과 일치가 되어보라.’ 고요. 사물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자기 자신에 사로잡히지 말고 사물 자체가 되어서 보아야 한다는데요. 마치 마이스터 엑카르트라는 교회의 영성가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 하느님도 끼어들지 않아야 한다고요.’ 쉽게 말해, 주님의 말씀도 내가 경험한 한정된 영역 안에서만 읽으려고 하면,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의 상태에 젖으면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만족하려고 들고, 쉽게 얻으려고 하다보면 오해를 하게 마련이고 탈이 납니다. 진정 당신이 뜻하고자 하는 바를 잘 모르게 됩니다. 갈멜의 산길에 보면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성이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려면 모든 것을 비워야 한다.’ 하셨고요. 보나벤뚜라 성인도 ‘지혜의 불을 받기 전에 먼저 자신의 내면을 정화할 필요가 있다.’ 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하고 있고요. 복음은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고, 우는 사람은 웃게 될 것이고, 부유한 사람은 이미 위로를 받았고, 웃는 사람은 곧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 손쉽게 얻는 기쁨으로 이루어진 헐값의 행복을 바란다면, 그건 주님이 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원하신 행복은, 검었던 것이 갑자기 희어졌다고 확언해주는 행복이 아니라, 불행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롭고 복된 출구를 제시하시는 행복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시각으로 탈바꿈 되어야만 그 말씀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행복에도 여러 수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라시는 행복의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당신은 그 이상을 말씀하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