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1 주일미사. 이사야 22,19-23;로마서 11,33-36;마태오 16,13-20
여러분의 신앙생활 기간은 어느 정도 지나셨습니까? 이제 막 시작한 분들도 계실 것이고, 10년, 20년 아니 그 이상이 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세월이 흘렀지만 당신을 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만큼 자신이 있으십니까? 만약 자신이 없으시다면 왜 신앙에 대해 움츠러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할까요?
베드로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요. 베드로는 예수님과 겨우 3년 남짓한 시간만 같이 있었을 뿐입니다. 3년이라는 시간은 어찌 보면 참 짧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린 얼마나 당신과 함께 있었습니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당신을 만지지는 못했지만 우린 베드로보다 더 오랜 기간 당신을 따라오는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고, 신학적인 지식, 성경적인 지식은 그들보다 못할 것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린 당신 앞에서면 작아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무엇이 우릴 위축되게 만들었을까요? 그저 겸손일까요? 아니면 신 앞에 있기 때문에 두려워서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무엇을 보고 사셨고, 무엇 때문에 그런 기적과 설교를 하셨으며 무엇 때문에 제자들을 불러 세웠는지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스승을 따라가는 제자가 되려면 적어도 그 제자는 스승이 어디를 보고 가는지를 알아야 참다운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스승이 보려는 방향과 같은 곳을 바라볼 때 그 제자는 스승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저 시험 잘 보고, 점수 잘 나오기 위해 산다면 그는 스승의 참다운 정신을 읽기 힘듭니다. 그러나 당장 점수는 안 나오더라도, 스승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기위해 노력한다면 나중에는 지금 1등하는 친구보다 더 높은 향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러한 모습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고 말한다면 또 그렇게 알고 있다면, 나와 예수님의 차이를 바라봐야만 하고 그분의 의도를 알아채야만 합니다. 물론 각자의 모습으로 당신이 다가오셨기에 당신을 처음 알게 된 방법과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첫 부르심은 그렇게 모두 다릅니다. 그렇게 부르심은 달랐지만 우린 같은 곳에서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당신께 답해드리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는 질문을 오늘 내게 던져주십니다. 질문을 그 사람을 일깨우고 그 사람을 현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이동시켜 줍니다. 우린 그렇게 멈춰져있던 나의 신앙의 자리를 옮길 때가 되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별 다른 이유 없이, 주일미사 다녀야 고해성사 안 보고 귀찮지 않으니까..’ 라는 신앙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 질문에 나는 응해야 합니다. 아마 베드로와 같은 답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마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이 모범답안만을 내놓기를 바라는 분이 아니니까요. 과정 속에서 차츰 차츰 이겨나가는 자녀가 되길 바라십니다. 나의 답이 남이 이야기 한 것과 다르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체험하는 단계는 각자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목동 본당 교우 여러분!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에 응답할 시간 말입니다. 이제 잠시두 침묵 가운데 나만의 답변을 당신께 말씀드리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