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9주간 화요일

2014. 8. 12. 오전 12: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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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19주간 화요일.에제 2,8-3,4; 마태 18,1-14

  본당에만 보더라도 참 많은 교우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들을 바라보며 항상 시선을 돌리면서 사람들은 스캔합니다. 그러면 대충 보입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사랑할 만한 사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 등등요. 우린 그렇게 매 순간을 비교하고 잽니다. 물론 우린 사회적 위치가 있기 때문에 겉으로 내색하지 않을 뿐, 나의 눈과 마음은 그렇게 바쁘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린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나보다 부족하고 가난해 보이는 사람마저도 실은 그런 한 사람이 역사를 이끌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역사상 굵직한 사건들은 모두가 힘을 합쳐 이뤄낸 것보다는 한 사람이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모세 없는 출애급이 가능했겠습니까? 간디 없는 인도독립이 가능했을까요? 요즘 다시 인기 상승 중인 이순신 없이 임진왜란의 승리가 가능했을까요? 이들 모두 과거가 순탄치 않은 인물들입니다. 감옥에도 가고, 도망도 가고 그랬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역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게다가 혼자 있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 에 대해 늘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홀로 자기의 영적인 문제에 깊이 관심을 두는 자가 실제로는 물질적인 관심에 빠져 대중 속에 섞여있는 자보다 훨씬 더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요.

  홀로 있기를 두려워하지 않던 에제키엘에게 이런 말씀이 내립니다.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그 두루마리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 묵시록 1010절에도 보면 비슷한 내용이 나와 있는데 여기에는 한 마디가 덧붙여집니다. 먹으니 꿀처럼 달았다. 그러나 먹고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어쩌면 묵시록의 말씀이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달콤한 면만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해 무언가를 해야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복음에 잘 나와 있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사람을 잃지 않는 것은 단순히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내재한 하느님을 모습을 만나야, 내가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을 도울 수 있고 나도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가부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쓸모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다른 피조물의 쓸모가 되게끔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부를 먹으려고 콩을 심고, 고기를 먹으려고 소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모든 게 인간 위주로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우린 이것을 발전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는 다른 피조물을 소모품으로 전락시키는 꼴입니다. 모든 것을 쓸모의 대상으로만 바라본다면, 끝내는 자기 자신마저도 쓸모의 대상으로 보는 안타까움에 빠지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마냥 편안하고 달콤하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곧 오시게 될 교황님의 메시지도 듣기에는 좋아보여도 실천하기에는 불편한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고 환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결국 우리 안에서 그런 면을 만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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