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에제 34,1-11; 마태 20,1-16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어떤 자세가 되어야 할까요? 솔직히 같은 가족이라도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하고, 계산적인 관계로 바라보는 경우가 참 많구요. 그러다보니 그 사람의 아픔을 여겨 봐 주기보다 내 현실 상황만 급급한데요.
오늘은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입니다. 시토 수도회의 수도승이며 클레르보 수도원의 원장을 역임한 이 분은, 어머니가 사망하자 ‘완전한 회심을 향한 먼 길’ 을 걷기로 결정합니다. 게다가 그는 복음적인 완성을 위하여, 베네딕도 성인이 지은 ‘규칙서’ 마저도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는 빈혈, 편두통, 위염, 고혈압 등을 달고 다녔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완전히 사랑하지 않으면 그 분을 알 길이 없다.’ 라고 말입니다.
정말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하십니다. 그런데 밭주인은 일꾼을 시간마다 나가서 찾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퇴근이 가까운 다섯 시까지 나갑니다. 당연히 일꾼들은 기대하지요. ‘자기가 먼저 왔으니 일당을 더 받을 것이다.’ 허나 당신은 똑같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답하지요.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이거 몰라서 묻는데요. 노동법에 걸리나요?
교황님이 비행기 타고 가셨다길래 또 다른 소식을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뉴스가 났더군요. 세월호 리본 때문에 누가 한 소릴 한 모양입니다. ‘중립을 지켜달라고.’ 요. 허나 당신은 “고통 받는 사람 앞에 중립은 없다.” 하셨다죠? 주님의 생각도 같은 모양입니다. 일자리 없는 이 앞에서, 계산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베르나르도가 말한 ‘하느님 아버지를 완전히 사랑하지 않으면 그 분을 알 길이 없다.’ 라는 말씀을 들으며, 우린 하느님을 그동안 어떻게 사랑했길래 내 시각에 갇혀 살고 있었던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잃은 양을 찾아 어디든, 어떻게든 찾아 나서시는 현장을 보며, 이웃에 대한 관심을 끄지 말아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