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노 주교학자 기념일.

2014. 8. 28. 오전 7: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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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노 주교학자 기념일. 1고린, 1,1-9; 마태 24,42-51

  사람들이 배운 것이 많아지고 똑똑해져 갈수록, 신앙보다는 자기의 머리를 믿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을만하면 받아들이고, 나의 범위를 너머서면 불합리하게 보는 경우를 만나는데요. 그래서 이제는 예비자들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게 됩니다. 그저 믿어야 합니다.’ 고 답하기에는 미심쩍어하는 그들의 표정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이런 경우는 있어왔습니다. 그럼 시대가 낳은 천재들은 과연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하느님은 재밌게도 머리가 좋은 이들의 상태를 너무 잘 아십니다. 당연히 이들의 허점도 아십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가 주님을 만나면서 무릎을 꿇는 장면을 보는데요.

아 우구스티노 성인은 커다란 항구도시인 카르타고에서 유년기를 지냅니다. 항구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미신을 많이 믿습니다. 도시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뱃사람들만이 가진 특유의 미신성향이 그들을 지켜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활기찬 항구도시의 기질과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식욕이 만납니다. 사실 워낙 분석력이 좋아 어떤 신앙도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반복된 어떤 소리를 듣습니다. “집어들고 읽어라. 집어들고 읽어라”. 이에 옆에 있던 성경을 펼친 것이 로마서 1313절에서 14절입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이미 여러 여성과의 스캔들이 있던 자기에게 해당된 이 말씀에, 확신의 빛이 밀려왔고 어둠은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이성을 추구하는 대신, 참 진리를 탐구합니다. 그러면서 어머니인 모니카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제가 그동안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었어요. 왜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 대신에 이렇게 질문했어야 했어요. 왜 선이 존재하는가?. 참된 선이란 신이 우리가 하길 원하는 것이에요. 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와 창조주의 의지가 완전히 일치된 때는 에덴동산 뿐이었어요. 그런데 낙원에서 추방된 후 우리는 신과 분리되요. 신과 떠난 후, 우리가 아는 악은, 신을 잃은 이 땅에서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 되어요. 이제 아담의 후손들은 도덕적인 혼란에 빠졌어요. 아파하고 힘든 사람을 보아도 왜 도와줘야 하는 지도 잘 몰라요. 즉 선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아는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에요. 이제 우리는 신의 부름이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게 되었어요. 신은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지요. 물론 우리가 갖고 있는 자유로운 의지가 신이 원하는 방향에 강하게 저항할 수도 있지만, 은총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우리의 본 고향인 에덴동산을 생각하게 하지요. 사실 신은 인간이 아니에요. 신은 인간을 초월하기에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볼 수 있어요. 신이 보기에 모든 인간은 선과 악의 모든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신은 이미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지를 알아요. 왜냐하면 신은 시간이라는 차원 밖에서 우리를 내다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이미 신은 모든 은총들을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내려질 것인가를 아셨지요. 따라서 신은 마땅히 인간 의지의 지배자입니다. 선택은 우리자신에게 맡겨진 것이구요.’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요사이 몇 군데 단체와 함께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저에게 하고 있는 말이, 본인들이 현재 잘 하고 있다는 점을 피력하느라 바쁜 모습이었습니다. 그동안 피해의식이 있던 것인지, 자기 방어를 하느라 현재 단체의 문제의 본질점은 보지 못한 채, 잘 하고 있다는 점을 제게 설명하느라 바쁘시던데요. 저는 여러분을 칭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못된 점을 여러분 스스로가 바라보고, 좋은 방법을 선택하면서 나아가게끔 하기 위해 왔습니다. 복음에 나온 깨어 있는 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자신의 현실에 도취되지 않습니다. 그것만을 즐기지 않습니다. 더 앞을 바라봅니다. 아우구스티노가 자신의 머리만을 믿었다면 그는 성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좋은 머리로 참된 것을 바라보고자 한 욕망에, 하느님은 단 한마디. “집어서 읽어라.” 는 말로 그를 이끄십니다. 사실 좋은 선생님은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거들어 줄 뿐이지요. 그의 이런 체험은 확신과 감사로 이어집니다. 오늘 독서에도 똑똑한 바오로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배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이미 우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모아온 구슬이 보배가 되려면 이 구슬을 꿰어야만 목걸이라는 상품이 되지요. 주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바탕으로 우리 자신을 다시 보았으면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어디에 묶여 있었는 지 한계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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