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2주간 토요일. 고린1서 4,6-15; 루카 6,1-5
1600년대 중국 청나라 사람 신함광이라는 사람이 이런 시를 지었답니다. 이기기 좋아하는 자는 반드시 지게 마련이다 / 건강을 과신하는 자가 병에 잘 걸린다 / 이익을 구하는 자는 해악이 많다 / 명예를 탐하는 자는 비방이 뒤따른다 / 세상에서 배웠던 교육들은 사실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승리하고, 건강을 유지하고, 손해 보지 않고 명예스럽게 사는 게 전부라고요. 하지만 그게 가능하려면 남의 패배를 밟으며 올라야 했고, 목적을 이루느라 몸을 혹사하기에 병을 얻을 수 밖에 없고요. 칭찬만 원했기에 비방은 부록으로 따라오는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점차 깨닫습니다. 무언가에 도취되어 있으면 그것이 주는 문제점들을 말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린 들여다봐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시련과 적막의 시간이, 오히려 사물의 이치를 분명하게 드러내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독서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바오로는 쓴 소리를 해댑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양 자랑합니까?” 주님이 내게 주신 것들을 살피면서 우린 알아갑니다. 역경이 없는 순탄하기만 한 시간이, 오히려 단조하고 무료하다는 사실을요. 고요 속에 자신을 돌아볼 줄 알 때, 마음이 비로소 선명해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고린토 사람들은 자신의 풍요로움이 마치 자기 것처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풍요는 감사가 아닌 당연함이고, 시련은 성찰의 시간이라기보다 짜증의 순간입니다. 그렇게만 생각하는 이에게 무슨 깨달음이 있겠습니까? 예전 조선시대 때 어떤 무사가 병서를 외어서 시험 보는, 병서 강독 시험에 응시했답니다. 시험관이 묻습니다. ‘만약 북을 쳤는데도 군사들이 진격하지 않고, 징을 쳤는데도 퇴각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겠는가?’ 시험 치다말고 무사는 시험관의 어리석은 질문에 대해 깔깔대며 비웃었답니다. 그 말을 들은 이가 말합니다. ‘바보 같은 질문이긴 하나, 종이 위에서 군대를 논하는 자가 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닐세, 분명히 그 사람은 직접 군대 일을 겪어본 사람인 것 같다.’ 는 말을 합니다. 알아보니 그 시험관은 예전에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가 공을 이루지 못하고 파직되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답니다. 쓰린 실패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실제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는데요.
오늘 바리사이들의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오?’ 라는 질문을 보며 피상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이의 한계를 깨닫습니다. 피상적인 사람은 막연한 성공만을 원합니다. 그것이 주는 실체를 알지 못하지요. 그러나 제대로 바라볼 줄 아는 이는 그 너머를 바라봅니다. 한계에 갇히지 않으면서 참된 것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