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파도바의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열왕기 상 19,9-16; 마태 5,27-32
살면서 각자만의 방식을 선택합니다. 예를 들자면 후천적으로 생겨난 성격부터 시작하여, 자기 적성에 따른 직업선택,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자기가 바라보기 편한 방식을 사용합니다. 마치 지금 망치가 필요한 지, 드라이버가 필요한지, 같은 드라이버라도 십자인지 일자인지를, 자기가 그동안 삶의 과정 속에서 갈고 닦아가고, 또는 거기에 안주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몇 십년을 살아오셨습니다. 그 시간이 여러분을 이렇게 만들어 오셨고요.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기만의 틀을 고정시키기만 한다면, 변하는 세상에서 제대로 대처를 못하는 불상사도 발생하게 됩니다.
오늘 엘리야 예언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이제껏 하느님을 통해 엄청난 기적을 이루었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과 하느님의 놀라운 큰 힘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면에서는 하느님이란 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바라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느님을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예전과는 좀 달라 보입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라는 말씀대로 하였더니 이렇게 다가오십니다. “바로 그 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불 속에서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이제껏 만난 하느님은, 힘과 뜨거움의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원천은 그런 활동성에만 있는 것이 아닌, 고요함, 침묵 속에서 이뤄지고 있음의 근원을 보여주시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만났던 하느님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셈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바라본 자신의 틀을 다시 보게 되는데요. 복음 말씀도 그렇습니다. 실천만 그렇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지만, 그 분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사실 우리도 그렇잖습니까? 대놓고 그 사람 앞에서 욕을 못하지만, 뒤에서는 이야기하고, 생각으로 욕하는데요. 그렇다면 이미 무엇을 품고 사는 지부터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매일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이한 안토니오 성인이 뛰어난 설교를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매일 하느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설교가 갇히지 않는 설교,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설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린 매일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젊음이 뭔지 알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