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5주간 목요일
가끔 복사들 중에서 신부님이 되고 싶다는 친구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이렇게 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성당의 대빵이잖아요” 즉 대장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요. 하지만 어쩌지요? 신부님들이 뭔가를 결정하는데 있어 그다지 자유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돌아가려면 ‘교회법전’ 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구요. 전국 주교님들이 만든 ‘한국 교회 사목지침서’ 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서울대교구가 만든 ‘규정집’ 에 따라 행정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당에서 리모델링이라고 하려 든다면 적정 수준이상의 견적이 나올 때는 교구로부터 허락을 받는 수순을 밟아야만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신부님들은 굉장히 부자유스런 사람처럼 보이지만, 모든 경우에 법이 적용될 수는 없기 때문에 ‘사목적 배려’ 라는 것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경우입니다. 예전 본당 주일학교에서 첫영성체를 위해 1년간 공부시키는 가정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아이들이 같이 공부를 해야 하는 아주 귀중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6학년 자폐증을 가진 아이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부모님이 계속 붙어서 교리를 시켰기에 문제없이 진행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건은 첫영성체 당일 날 터졌습니다. 저와 수녀님이 같이 성체분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수녀님 라인에 있다가 성체를 모시자마자 “으악~” 하면서 뱉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일단은 수녀님이 떨어진 성체를 모셨고요. 저는 부모님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 분은 말하길, 그동안 성체 모시는 연습을 시키려고 뻥튀기를 가지고 했답니다. 하지만 성체와는 맛이 달랐기에 뱉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조심스레 물어보았습니다. “아이가 성체인지 아는 것 같습니까?” 그러자 엄마는 모르는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당연히 고민이 되었구요. 제가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오늘 독서 말씀은 자기들도 다 못 지키는 모세의 율법을 이방인에게 지우지 말라면서, 멍에를 벗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베드로는 이야기 하고 있구요. 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덩치가 커지다보면, 여러 규칙과 행정적인 관청이 될 우려가 있습니다. 마치 지금의 나라처럼 말이지요. 그러다보면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비극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언제나 당신의 가르침에 머물러야 하는데요.
이제 아까 문제에 대한, 저의 행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명동성당에 장애인 주일학교가 있어서, 그 곳 신부님께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성체인지조차 잘 모르는 아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영해줄 수 있느냐?” 물으니, 교회 가르침에 나온 것처럼 ‘같은 교회 공동체의 믿음’ 이 있기에, 그것으로 허락한다는 답을 들려줬습니다. 마치 마르코 복음 2장에 나오는, 들것에 실려 온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이유가 환자의 믿음이 아닌, 지붕을 벗기고 환자를 매달아 내린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서 낫게 해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꽃동네에도 성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많은데, 영성체를 해주고 있음이 기억났습니다. 저는 그 어머니를 다시 불렀습니다. 제병 30개를 드리면서 연습시키시라고요. 물론 ‘성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이에게 영해주는 차원’ 에서만 본다면 원칙에 어긋납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지금 아픈 아이입니다. 그리고 주일학교에서는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일수록 당신께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게 머물 때, 갑작스런 변화에 대해 발 빠른 대처가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린 사랑하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이니까요. 그럴 때 당신께서 말씀하신 기쁨의 차원이 이 현실 안에서 어떻게 이뤄지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린 그것을 만나야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