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성야 미사

2014. 4. 19. 오전 10:4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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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성야 미사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옆의 분들과 기쁨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 이전과 이후, before after가 다른 방법으로 인사를 하십니다. 그게 뭘까요? ~ 바로 평안하냐?” 라는 인사입니다. 어느 복음을 보더라도 그전까지 말씀하지 않으신 방법의 인삿말입니다. 어째서 그러셨을까요? 이제 당신은 사람이라면 넘을 수 없는 죽음마저도 이기신 분이기에 가능한 인삿말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 부활이라는 초월은,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가능하다는 것을 믿음을 통해 알게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부활이 있기 위해서는, 희망이 있기 위해서는, 십자가라는 고통과 수난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흘러가는 사태를 보며 우리가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 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잃은 후,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라며 그물을 들고 예전 삶으로 돌아갔었고요. 모든 희망을 상실한 듯, 엠마오로 가던 제자도 있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도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사고가 났는데도 높은 사람에게만 잘 보이려 하고, 모든 일을 그 때만 잘 넘겨보자는 땜질방식으로 일관하여, 원칙이 없는 세상이 되고, 그러다보니 국민들은 실망하고 피해자의 가슴은 더 큰 멍이 들고 마는데요. 마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런 때 제일 손쉬운 방법이 뭘까요? 여기를 탈출하거나 예전방식으로 돌아가는 자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까요?

  예전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백혈병을 앓고 있던 열 여덟 살 소녀를 찾아가신 적이 있답니다. 그 소녀도 자기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고, 추기경님도 그 병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 때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서만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야. 희망이 없는 곳에도 희망을 걸어야 해. 무슨 말인지 알지?” 우리가 바라는 부활과 희망은, 내가 원하는 수준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건 희망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는, 편협한 희망이니까요. 우리는 그걸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창조하신 하느님을 본받아, 도망가거나 불평만 늘어놓지 말고, 마치 뻘 밭 같이 아무 것도 세울 수 없을 것 같은 거기에서부터, 주님의 이름을 붙잡고 새로운 건설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그걸 하셨고, 우리도 우리 안에서 할 역할이 있습니다. 부활은 그렇게 이뤄져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서 그 역할을 잘 찾아야 하겠습니다.

댓글 2

  • 2014년 4월 19일 오전 11:05

    아멘!

  • 2014년 4월 20일 오후 9:24

    "희망이 없는 곳에서도 희망을 걸어야해"...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