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2주 토요일.

2014. 3. 21. 오후 10:15:02

글자

사순 2주 토요일. 미카 7,14-20;루카 15,1-32

  여러분은 어떤 사랑을 하고 계십니까? 모든 것을 받아주는 포용력이 있는 사랑을 하십니까? 아니면, 너 하는 거 봐서~’ 하는, 상대의 반응에 따라 대응해주는 사랑을 하십니까? 많은 경우가 선을 긋고 있는 사랑을 합니다. ‘여기까지~’ 라고 금을 그어놓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사랑을 하지요. 왜냐하면 나 스스로가 그 사람으로 인해 더 이상 다치고 싶지 않으니까요.

  오늘의 복음을 들으시며 여러분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집 나갔다가 돌아온 작은 아들의 케이스가 여러분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요. 이렇게 아침마다 열심히 나오시는 것만 보더라도, 설사 예전에 그랬던 과거가 있었더라도 이젠 아니죠. 하지만 많은 수의 교우분들이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보다는 큰 아들 같은 경우에 머물고 있음을 느낍니다. 큰 아들이 별로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우직하게 아버지 말씀을 잘 들었고, 또 시킨 데로 열심히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일탈을 할 만큼 용기가 없었거나, 그나마 갖고 있는 것을 잘 지키는 것이 상책이라 여겼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명()을 따르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모범적으로 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아버지가 작은 아들에게 해 주고 있는 행동을 보고 분개합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시는군요.” 솔직히 그 심정 이해갑니다. 그동안 고생한 본전 생각나겠지요. 그러나 한편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밑에서 그나마 잘 지내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당연하다 라고 여겼던 것마저도, 실은 말씀 없는 가운데 나온, 아버지의 배려였음을 말이지요. 큰 아들이 보기에 아버지의 사랑은 너무 퍼주는 사랑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치우치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자신이 무슨 사랑을 받는 지 몰랐기에 이제는 그런 사랑을 받아야 했구요. 큰 아들은 이미 아버지와 함께 하고 있었기에, 그 보살핌 속에서 필요한 사랑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린 서로의 처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똑같은 사랑을 기대하기보다, 계산적인 사랑을 하기보다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어떤 사랑을 해줄 수 있을까?를 알게 만들 수 있는 고민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할 때, 불만에 가득 찬 큰 아들같은 사랑에서 벗어나, 큰 스케일을 보여준 아버지의 사랑을 닮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1독서에 나온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아멘

댓글 1

  • 2014년 3월 22일 오전 10:4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