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2주일 미사.
찬미 예수님. 일주일 동안 교우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사람이 살면 여러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 할까요? 여기서 문제를 풀어가는 몇 가지 방식의 예를 들어보겠으니 골라보시기 바랍니다. 1.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감각적인 것을 거부하면서, 오로지 종교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고, 지상적인 것을 다 접으며 신적인 세계 안에서만 살려고 한다. 2. 현재 나를 속박하고 옭아매는 것과 대립되는 것에 갈등을 느끼며 살고 있기에, 복음적인 충고를 멀리하고 실로 인간적인 삶만을 추구하려 한다. 3. 하느님을 저버리거나 물질세계를 버리는 것도 아니며, 자기 눈에도 불완전하고 남이 보기에도 불성실한, 어중간한 생활을 계속 감수하며 살 수 밖에 없다. 답은 뭘까요? 그렇지요 여기 세 가지 길 안에는 답이 없습니다. 자기를 왜곡시키든지, 또는 자신에게 집착하던지, 마지막으로 이중적인 사람이 되던지, 결과가 나쁘기는 매 한 가지이니까요. 그럼 이런 난점을 피하면서 사는, 제4의 길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답게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건전한 사랑을 양립시키는, 조화로우며 상호 보완적인 길이어야 하는데요.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주님께서 거룩히 변모되는 사건입니다. 이는 모두가 부활하여 새롭게 살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하지만 이건 천상에서나 가능할 법한 것처럼 보입니다. 1독서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약속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하지만 어떻하죠? 아들 하나 없는 현실에서 무슨 큰 민족이 되게 하고 이름을 날릴 수 있단 말입니까? 너무나 허망한 현실을 앞에서, 허공 속에서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헛된 약속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린 십자가를 보면서 답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들어왔던 십자가는 이렇습니다. ‘희생이요, 자기를 바친 제물이며, 죄를 용서받는 속죄의 도구라고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용어를 너무 무의식 중에서 가벼이 사용했기에 참 뜻을 잃어버려 무덤덤한 상태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란 내가 알고 있던 감각적인 세계와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즉,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한,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만큼의 성질을 벗어날 때, 십자가가 가르쳐주는 최종의 목표단계를 알 수 있습니다. 그건 이른바 힘 빼기 작업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만 멈추지 않는 것, 내가 바라는 것만 보지 않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뜻하심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주님의 모습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직까지 자기 자신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만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린 기억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변모사건을 통해 주님이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알았지만, 십자가라는 공포의 시간이 다가오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버린 약한 제자들의 모습을 말이지요.
사랑하는 목동 교우 여러분~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 당신의 약속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오늘 2독서에서 이런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제껏 내가 갖고 있던 힘을 빼면서, 주님의 뜻으로 자연스레 옮겨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아직 우리는 보고 싶은 면만 바라보는 사람들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