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5 주간 토요일 요한 11, 45-56
때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입니다. 한 방에 모여 앉은 그들은, 비상 의회를 소집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기서 나올 의견들은 앞으로 그들의 장래와 직결되는 사항이기에 그들은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의 옳음을 그냥 두고 보자니, 율법학자라는 자신들의 위신이, 한 명의 방랑 설교가에게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러자 카야파는 그 해의 대사제로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카야파는 자신이 이야기 한 것이 그저 지금의 상황을 타결해 나갈 방책이라고 생각하였겠지만, 실은 하느님의 섭리에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과연 그때 알았을까요?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이 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지금 자기들의 회의 시간이 그저 자신들의 난국을 타개하는 정치적인 시간이라고 여겼지만, 실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른 행동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자기들이 생각하기에도 자기 자리와 목숨을 유지하고자 한 이 야비한 방책이, 실은 하느님 구원 계획을 돕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참으로 무섭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행하신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손으로 막으려 해도 태양의 빛을 가릴 수는 없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계획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혹시 우리도 율법학자들처럼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미 그분의 계획안에, 그분의 생각 안에 포함되어 있는데, 오히려 내가 더 똑똑하다 여기면서 살았던 것은 아닌 가 반성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