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3주일

2014. 5. 3. 오후 2:42:46

글자

부활 3주일. 사도 2,14-33; 1베드 1,17-21; 루카 24,13-35

  예전 정채봉님의 글. 형과 아우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우가 형에게 물었다. ‘내 인생은 왜 이리 고달플까?’ 형이 말했다. ‘인생에 햇볕만 쨍쨍 쬐이면 그 인생이 사막이 되어버리니까’...” 좋은 날씨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좋은 날씨만 계속되면 너무 건조하다 못해, 모든 것이 메말라 버릴 수도 있는데요. 그래서 그런 지 기후도 가끔씩은 변화가 있어야 한답니다. 태풍도 치고, 폭풍우도 몰아치고, 그래야 한답니다. 그래야 바다 밑에 깔린 것들이 뒤집어지면서 자기 자리를 잡는다는데요. 요사이 뉴스를 보면서 그런 것을 느낍니다. 하나가 잘못하면, 마치 쥐 잡듯이 모든 것을 솎아내듯 조사합니다. 한편으로는 다행입니다. 제자리를 잡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모든 방법을 동원하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행입니다. 첨예하게 조사하며 파고 들어가지만, 그 안에는 번뜩이는 칼날의 날카로움은 있을지언정, 따스함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우리 안에 지금의 모습은, 마치 기운이 쫙 빠진 것 같은 그런 세상을 보는데요. 저는 지금의 현장을 보면서 이 난관이, 어떻게 희망으로 탈바꿈 되어야 할까? 를 고민하게 됩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아직 주님의 본 계획이 무엇인지는 헤아리지 못한 단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은 기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라는 말처럼, 이들은 성경에서 예언된 내용을 듣긴 하였지만 진정 이해하지는 못한 단계였습니다. 교우분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이런 경우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라는 제의를 해도 이미 성당에서 미사 드리며 잘 하고 있다.” 라는 답변을 들을 때, 개인적으로 힘이 빠집니다. 왜냐하면 신앙도 지금의 단계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인도해 드릴 수 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마다하는 분들을 뵙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도 자기가 보고 싶고 만나고 싶던, 메시아 관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의 관한 기록을 설명해 주시며,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낼 때 에야 그 분이, 자기들이 찾던 주님임을 알아봅니다. 1독서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진정한 의도를 알게 되자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그러나 성경을 처음 읽기 시작한 분들은 혼란을 느낍니다.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이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는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율법을 만드시더니, 저기서는 사랑만이 보여지는 것 같다고요. 그러나 생명의 하느님은 그동안 이 둘을 하나로 연결하시기 위한 공사를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마치 집을 하나 지으면, 철골로 뼈대를 세우고 수도시설을 갖추기 위해 배관공사를 합니다. 하지만 아직 사람은 살 수 없는 단계입니다. 여기에 벽지를 바르고 장판을 깔고, 가구를 들여놓고, 수도관에 물을 흐를 때, 그제서야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 됩니다. 하느님은 그런 단계를 세상 창조 때부터 계획하셨습니다. 하나하나 느린 듯이 보여졌지만, 쉬지 않고 당신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와중에 계속 태어났고, 이를 다 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했기에, 그분의 계획을 다 헤아리진 못했습니다. 수 많은 구약의 예언자를 통해 이미 그것을 알려주었지만, 당장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흘러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그제서야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업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요.

  사랑하는 목동 본당 (청년) 교우 여러분

  한 수도원이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천년이 시간이 필요하답니다. 그 천년은 별별 것을 다 봐야하는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동안 교회의 역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1570년 갈멜 수도원의 십자가 성 요한이 수도원을 개혁하려 했을 때, 개혁을 싫어한 반대파는 그를 성당 다락방에 9개월간 가두었고요. 그리고 지금처럼 성상과 성화가 성당에 걸리기 위해서는, 이를 떼었다 붙였다가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원래는 하느님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니까요. 그러나 성화상 그 자체가 하느님이 아니라, 성화상을 통해 감각적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주님을 만나는 신앙적인 기회로 제공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6세기부터 100년간 시작된 논쟁은 787년 제2차 니체아 공의회에서 지금처럼 결정되어 성당에 걸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제대로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강론 제일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좋은 날씨를 바란다고 그게 꼭 좋은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듯이, 지금의 위기사항을 보며, 오히려 저는 차근차근 주님께서 일하신 그 방법을 들여다봅니다. 당장에는 내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헤아리듯이 말입니다. 신앙 안에서 그런 거시적인 안목이 잘 키워지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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