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6일 되재,고산 순례기1] -도봉동성당 김용준 바실리오

2014. 3. 24. 오후 4:20:24

글자
 

믿음의 고향에서

 

김용준(바실리오)/순례자·도봉동 성당

 

되재 공소와 수청 공소는 모자 같기도 하고, 자매 같기도 하다. 먼저 되재 공소는 4명의 성인과 100여 명의 순교자를 탄생시켰으며, 1895년에 8각 기와와 8칸짜리 한옥으로 한국에서 서울대교구 중림동 약현 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일 뿐만 아니라, 한옥 성당으로는 우리나라 최초 성당이다. 자재는 논산의 쌍계사를 헐면서 나온 목재를 사용했다니 아이러니하다.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지만 아직 박해의 여파로 산골에 성당을 세워 큰 교우촌이 형성되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신자들의 이주로 교세가 위축되어 10대 서병익(徐丙翼, 1881~1948, 바오로) 신부 당시 공소로 전락됐다.

1942년 수청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오히려 수청 본당 관할 공소로, 1958년 본당 소재지 변경으로 고산 본당 관할 공소로 돼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되를 뒤집어 놓은 것 같다’하여「되재」(升峙:승치)라 부르는 이 공소는 남녀 좌석이 구분돼 있는 성당 중 하나다.

우리도 되재 신자들처럼 우측에 남자, 좌측에 여자로 구분해 앉기로 했으나, 남자 순례자가 적어 앞에 앉아서 미사를 봉헌했다. 「남녀7세부동석」이 요즘은 「남녀7세자동석(?)」이 됐으니 많이도 변했다.

작은 성당에 130여 명이 입장해서 반쪽으로 나뉘어 앉으니 집중이 잘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또 신부님 모습 역시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오랜만에 양형성체를 모시니 가슴이 찡하게 저며 온다. 영적 배고픔은 면했지만, 육적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피정의 집으로 갔다. 프랑스 신부님이 가져오셔서 퍼뜨린 미나리와 비슷한 크레송[물 냉이]은 인기가 최고다.

우리의 미나리는 저급수를 상급수로 정수 역할을 하므로 흙탕물에서도 잘 자라지만, 이 크레송은 1급수에서만 자란단다. 우리 고유의 김치처럼 먹는다는 크레송 무침은 상큼한 향이 입안에 퍼지면서 새콤달콤한 맛에 아삭아삭하는 식감이 정말 좋다. 시골 할머니의 손맛을 느끼며 쑥국도 한 모금씩 음미하며 마셨다.

우리는 1•2•3호차 순으로 십자가의 길을 향했다. 50도 안팎의 경사에 미끄러운 낙엽을 밟으며 외길을 올랐다. 땀을 흘리며 힘들어 하는 내 모습과는 반대로 숨은 거칠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지으며 기도하시는 반백의 자매님에게서 나는 순교자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곳에서 사셨다는 이영선(스테파노) 전 공소회장은 버스 3대로 방문한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시더니, 떠나려는 차에 올라 “반찬 맛없지?”하고선 해맑게 웃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신다. 순간 확고한 믿음으로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의 모습을 또 발견했다.

20km를 달려 수청 공소에 도착했다. 간판도 없어 마치 폐교된 시골 분교처럼 보이는 수청 공소는 출입문마다 각목을 X자형으로 투박하게 막아 놨다. 붕괴의 우려가 있다는 안내문과 함께. 내부는 제대, 그 뒤편은 붉은 천으로 가려져 있고, 마루 바닥에 긴 의자 16개, 천정에 회전식 선풍기 하나, 해설대(사진에 보이는 것만) 외에 성물은 하나도 안 보인다.

그 옛날에는 온 동네에 울려 퍼졌을 종은 그대로 매달려있건만 미세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성모님과 예수님만이 쓸쓸하게 서로 바라보시며 그 옛날을 회상하며 신자들을 기다리시는 듯하다. 질척한 마당에는 봄을 맞아 신자들 대신 풀이 자라고 있다.

주위의 57개나 있었다는 공소가 이제는 흉가처럼 흉물스럽단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구역 모임 장소로 대체 활용되고 있다지만 마음이 아프다.

 

댓글 2

  • 2014년 3월 25일 오후 4:24

    형제님의 멋진 순례기에 순례하던 그날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감사합니다.

  • 2014년 3월 26일 오전 10:06

    세세한순례기잘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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