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6/16전주교구 순창지역

2013. 10. 23. 오전 10:35:00

글자

전주교구 쌍치 성당, 오룡촌 공소, 배재 성당터 순례기

 

김용환(요한)/ 순례자 ․ 양천성당

 

고백

오후 네 시. 이곳은 모악산 기슭 탑선 숲 속 입니다. 마지막 순례 일정인 배재 성당터를 향하는 교형 자매들 뒤편에서 저는 배가 되어 정박 중입니다. 배재. <배가 지나가는 고개>라, 수로가 아닌 육로로 올라 온 배라니. 참으로 낭만적입니다. 낭만이라니, 저는 순례자로서도 자격 미달입니다. 조선 정부의 서슬 퍼런 칼날이 언제 어디서 다시 번뜩일지 모르는 와중에 동학민란의 광풍이 노도처럼 일었고, 이를 피하여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이 깊은 산속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모시고 따르기 위해서 저 아래 편에 펼쳐진 만경 평야, 기름진 전답을 버린 그분들의 열정 뒤에서 저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배가 지나가>던 풍경 속 거룻배 한 척으로 멈추어 버린 나는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버리지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는지, 하늘이 다르던가 산이 다르던가 물이 다른던가? 설사 모두 달라졌더라도 한결 같으신 하느님을 따르는 나는 그들을 따라가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나는 무엇이 두려워 그들이 갔던 그곳으로 들지 못하는가?

 

십자가

오전 열 한 시. 첫 순례지 쌍치성당. 조용한 농촌 공소였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는 상주하지 않으시나 평신도 선교사 부부의 희생으로 성전이 세워졌고, 그분들의 기도와 정성이 곳곳에 배어있었습니다. 제대 뒤 고상 속의 두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안고 계시듯,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안고 계시듯, 순교자들을 지켜주던 저 하늘이 저 구름을 안고 지켜주었듯, 나를 바라보는 저 하늘이 저 구름을 지켜주듯, 주님께서는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분노와 교만이 나를 유혹하고, 나를 결박하고, 나를 쓰러뜨리고, 나를 고문해도, 나는 십자가를 향하여 기어서라도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처럼 매달려야 합니다. 고개를 들어 구름 위에 걸려있는 묵주에 친구합니다. 그 시절 유월 초여름 하늘이 오늘 예수 성심의 햇살이 되어 지상의 거룻배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요안나 할머니

배재 성당터에 오기 전에 우리가 잠시 머문 오룡 공소, 살아있는 교우촌. 팔순은 훌쩍 넘기셨을 자매님이 불편한 허리를 굽히고 세우시길 반복하며 성모님께 인사하고는 이곳저곳 공소 소개를 해주셨습니다. 이름 모를 나비들이 성전 마당에서 우리를 반겨줬습니다. 봉사자님의 신심 향기 가득한 해설을 듣고 다음 행선지로 떠나려 할 때 우리를 아쉬워하며 바로 그 나비들이 내리막 앞길을 막았습니다. 할머니 얼굴을 카메라에 담으며 작년에 선종하신 제 어머니 로사를 만났습니다.

로사리오

오후 다섯 시. 전주 교구 복흥 성당 토마스 신부님의 강론이, 전주 교구 신앙 선조들의 맑은 영성이, 배재 성당터 입구 탑선 종점 하늘의 구름 묵주가 교우촌을 지향하며 본당 공동체로 달려가는 우리의 순례 여정을 아름다운 전구로 가득 담아주실 것입니다. 나의 비겁한 정박을 우리의 결연한 순항으로 변모시켜 주실 것입니다. 순교자 현양회의 모든 순례의 범선을 주님께서 성모님의 등대로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분들이 저를 용서합니다. 신앙의 선조들께서도 저 먼 발치에서 제 유약한 신심을 격려해주십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50분간의 제 짧은 배교를 용서받습니다. 다섯 번째로 들어오는 낯익은 자매의 이마에도 맑은 땀방울이 보입니다. 제 아내 요안나입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혼배성사 후 처음으로 그녀에게 머리 숙여 인사합니다. 그녀도 오랜만에 저에게 머리 숙여 인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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