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3/17 순례기-인천 반주골,답동,제물진두

2013. 3. 26. 오후 1:04:04

글자
봄에 오시는 성모님
 
심정택(베드로) / 대치2동 성당
 
지난해 여름 끝자락에 만난 지인의 도움과 권유로 지난 연말과 연초에 걸쳐 경기도 가평, '성모마리아'은둔소에 8박9일간의 피정을 다녀왔다. 첫날 밤부터 나흘간 내내 눈이왔다.
 
한 겨울 가평 수도원에서
홈빡 눈을 맞고 서 계셨던 성모님,
조금 이른 봄맞이 하러 오셨다
행여 나를 보러 오심인가.
수줍어 말 못하고,
우러러 뵌 얼굴은 조용히 웃고 계셨다
묵상 내내 웃고 계셨다.
뒷동산에서 놀다 내려오니
어린 쑥 피어있는 풀 밭에서,
아이들과 놀고 계셨다
얼굴 가득 모든 것을 안고
울고, 웃고 계셨다.
 
처음으로 떠나는 성지 순례길이다. 전 날 밤, 어린아이처럼 설레어 성모님을 생각하면서 기도 드리니, 가곡 '봄처녀 제 오시네'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약간의 감기 기운을 안고 사당역에 도착하니 일행들이 먼저 와 계셨다. 통상 내공이 많이 쌓인 모임일수록 회원간 조용한 인사가 오간다는 것을 알수 있다. 8시에 정확하게 출발하여 첫 일정인 인천 답동 성당에 8시 50분에 당도했다. 답동 성당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인천시 중구에 속한다. 옛 지명인 제물포(지금은 항동 일대)를 내려다 보고 있는 인천 유일의 국가 지정 문화재 제 287호이기도 하다.
옛 이름은 제물포 본당으로 조선교구장 블랑(1884~1890년, 프랑스 외방선교회)의 지시를 받아 빌렘(홍 요셉, 1860~1938년)이 1889년 7월 1일 설립하였다. 신자 수의 증가로 빌렘 후임인 마라발 신부는 1897년 3년간의 공사 뒤에 현재의 위치에 성전을 건립하고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 축성석을 갖는다. 건평 396평으로, 벽돌로 된 단층 건물로 전면에 세 개의 종탑을 갖춘 고딕 양식이었다. 현재의 성전은 1937년 완공되었는데 이전의 성전 양식에 외벽을 벽돌로 쌓아가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변모된다.
안중근 의사에게 세례를 주었던 빌렘 신부는, 1909년 10월 26일에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깊은 고민에 빠졌다. 빌렘은 교구장 뮈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앞두고 있던 안중근을 여순 감옥까지 찾아가서 그에게 종부성사를 거행한다. 뮈텔은 빌렘을 파면했으나, 빌렘은 이후 종교재판소의 재판을 통해 사제로 복귀한다. 교회법과 인간으로서, 사제로서의 양심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빌렘은 양심에 따른 행동을 한 것이다.
답동성당의 이민주 세례자요한 주임 신부님은,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들의 어머니의 등을 밟고서 조선으로 선교를 왔던 당시 프랑스 외방선교회 사제들의 희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인천 지역 성지 순례는 가치 있을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일행을 위해 강복해 주셨다. 답동성당이 위치한 제물포는 19세기 중엽~말엽의 미국, 일본, 러시아등 열강들의 국제 정치의 화약고와 같은 곳이었고, 쇄국 정책을 펴던 조선 왕조의 보수파들은 당시 국내 진보 계층이 받아들인 천주교를 직접적으로 탄압, 국내 대척 세력및 외세를 겨냥한 곳이기도 했다.
이승훈 베드로는 18세기 말, 남인의 대표적인 지식인인 이벽등과 어울렸던 진보적인 인물로, 1784년 2월경 중국 베이징에서 예수회 소속의 그라몽 신부로 부터 영세를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세례자가 되었다. 그는 사제가 진출하지 않은 국가에서 평신도로서 이벽,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수 밖에 없었던 가성직 제도를 주도함으로써 한국 천주교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다. 세 번에 걸친 이승훈의 배교는, 우리보다 가톨릭이 먼저 전파되었으나 참혹한 일본 봉건제를 뚫고 순교의 피를 뿌렸던 사제 얘기를 다루고 있는 일본 가톨릭 문학의 대가인 엔도 슈사쿠가 쓴 '침묵'에서 여실히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저자는, 배교를 하느냐 아니면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거꾸로 매달려 고통을 받아야 하느의 양자택일의 궁지에 몰린 신부가 신자의 죽음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던 인간애를 통해 드러나는 이웃사랑을 보여준다.
지금 차이나타운 초입 한중문화관에서 부두쪽 방향으로 예전 간석지 공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제물진두(津頭)에서 쇄국정책을 펴던 조선말 무기력하기만한 정권은 1868년 4월 15일, 1871년 5월 17일, 21일 세차례에 걸쳐, 외적과 내통했다는 명분으로 자국(自國) 백성인 천주교 신자 9명을 참혹하게 처형했다. 이 중에는 이승훈의 직계및 방계가 4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차이나 타운 중국 식당에서 짜장면, 짬봉, 볶음밥으로 메뉴를 구분해서 좌석을 배정받고 맛있는 식사를 나누었다. 바로 인접한 해안성당에서 추천받은 음식점이라 그런 지 맛도 괜찮았고, 특히 식사량이 많았다.
인천 항동 지역은 근대 건축물들이 많다. 그 중에서 일본 수탈 정책의 최일선에 서 있었던 일본 18은행 건물을 개조해 만든 '인천개항장 근대건축 전시관'을 둘러 보고서 19세기 말 제물포 전체를 내다 볼 수 있는 답동 언덕에 성당 자리를 잡은 프랑스 외방선교회 신부님들의 안목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반주골 정수장 철책 길을 따라 이승훈의 묘가 있는 1.3키로 미터 얕은 오르막 길은 이 날의 순례를 마무리 짓는 '십자가의 길'로 바쳤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가는 것은 단순히 용기나 신념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을터. 더구나 신앙을 이끌어 줄 사제가 없는 고난의 길을 그는 갔다. 200년을 앞서 18세기말~19세기초 이 땅에,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세계에 유례 없는 사실상 자생적 가톨릭 신앙의 뿌리를 내린 이승훈 그는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겠는가. 한국 가톨릭은 200여년 만에 이승훈과 같은 선각자들과 수많은 순교자들이 흥건히 흘린 피의 댓가로 500만명이라는 교세를 가지게 되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가톨릭 신앙인은, 우리보다 100여년이상 일찍 신앙이 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인구의 1% 미만만이 가톨릭 교도인 일본, 90년대 말 바티칸과의 국교 단절로 사실상 신앙이 지하화하고 있는 중국을 생각할 때, 그 시대적 소명은 중차대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순례길이었다.
 
엄마 !
 
나를 살려주신 엄마!
자유케 하시고 죽음을 벗어난 평화를 주신 어머니, 성모 마리아님!
나팔 소리와 북소리에 맞추어
춤추게 하소서,
생명의 춤 추게 하소서,
모두 모여 밤 새 춤추게 하소서
모닥불, 신산한 바람, 아침의 환희가 어울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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