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관아 ~ 한티고개, 해미성지 순례기
고재우(프란치스코)/ 순례자. 등촌1동성당
덕산군 관아터(현 덕산초등학교)에서 옛 천주교인이 갖은 고문을 당한 뒤 사슬에 묶여 해미현 관아로 출발하는 광경을 묵상하고 인근에 있는 덕산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날씨는 춥지만 성지순례하기 가장 좋은 시기인 사순시기이므로 뜻깊은 성지순례를 축복해 주시며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는 기도행위이고 세상사를 끊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수행자의 길‘이라는 신부님 말씀을 되새기며 당시 죽음의 길로 악명 높은 순교자 압송로인 한티고개로 향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군 해미면을 가르는 가야산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한티고개를 넘어 붙잡혀가던 숱한 순교자들이 고개 마루터에서 고향 마을을 마지막으로 눈물로 뒤돌아보이는 곳에 세워진 대충 깎아 만든 나무십자가는 한티고개가 영광의 길임과 애통함의 길임을 말해주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드리고 나서 해미읍성 정문인 진남문에 도착했다.
해미읍성(해미진영)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의 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 통치를 하던 곳으로 국토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하였다. 이 기간은 천주교회사에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병인 대 박해 때에만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명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도 바로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해미읍성 감옥터 앞에는 당시 손발을 묶이고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리어 고문대로 쓰여지던 호야나무 거목이 지금도 흔적을 지니고 우뚝서서 순례자의 발길을 무겁게 한다.
서문밖 순교지는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로 죽이기도 하였고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는데 서문 밖 바로 앞에 있는 칠십평 좁은 순교지에 자리개질해서 죽였던 그 터에 모조돌다리가 자리하고 있고, 그 곁에 1989년에 세운 순교 현양비가 있다. 2009년 1월 8일에 자리개돌 원석은 여숫골 순교자 기념관 맞은편에 옮겨 보존되어 있다.
해미성지는 1866년 병인년으로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 많은 숫자의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기 위해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들어 산사람들을 밀어 넣어 흙과 자갈로 끌어 묻어 생매장형을 한 곳이다. 또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였는데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죄인 둠벙이라 부르다 지금은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해미진영 서녘의 생매장 순교 벌판이었던 해미성지를 1935년도(일제 시대) 서산 본당의 범 베드로 신부님 지도하에 발굴한 유해 일부와 유품 성물이 별도로 보존 처리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유해 발굴지 하천 위에 16m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조형물인 해미순교탑이 세워져 있다.
해미 성지는 1998년 말에 생매장 순교 성지를 약 7천평 확보하였고, 2003년 6월 17일 기념 성전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셔놓고 있다. 이렇게 조성된 생매장 순교지 일대는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듣던 곳이 이제는 주민들의 입으로 "여숫골"이라는 이름의 땅이 되어 오늘의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