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쪼개는 사랑

2009. 1. 25. 오후 6: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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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쪼개는

              

 

쪼개는 마음이 곧 용서하는 마음이요

화해하는 마음이며 사랑의 근본이다.

자기 마음을 쪼개지 않는 사랑은 거짓이다.

 

  

   살아가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은 무엇일까? 남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이 아닐까? 용서와 화해는 어쩌면 사랑하는 일보다 더 어렵다.  용서와 화해는 우연히 내 주변에서 만난 사람, 나와 무관한 어떤 사람이 아니라 직, 간접적으로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그러다가 미워지거나 원수가 된 사람을 상대로 해야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를 모욕하는 자가 원수였다면 차라리 견디기 쉬웠을 것을, 나를 업신여기는 자가 적이었다면 그를 비키기라도 했을 것을, 그러나 그것은 내 동료, 내 친구, 서로 가까이 지내던 벗, 성전에서 정답게 어울리던 네가 아니냐."(시편 55, 12-14)

 

   용서와 화해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청에 따라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봐도 알 수 있다.

 

   주님의 기도에는 사랑이라는 말은 한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용서라는 말은 두 번씩이나 나온다. 그리고 또 예수께서는 재단에 제물을 바치러 가다가 친구와 화해해야 할 일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그 자리에 놔두고 그에게 가서 먼저 화해하라고 강조하신다. 이웃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가난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은 그래도 기쁘고 즐거운 일이지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을 요구한다. 초인적 힘이란 바로 자기를 죽이는 힘, 하느님의 힘, 신적 힘이다. 이 힘이 없이는 자기에게 상처를 준 이를 사랑으로 감싸안을 수 없다. 기도조차도 불가능하다.

 

예수께서는 이 힘으로 스스로 잘못한 것이 없으면서도 당신 자신을 죽이며 인류 세계 안으로 들어오셨다. 인류가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손과 발에 못을 박고, 가슴에 상처를 줄 존속들이건만 바로 이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죽이는 신적 힘을 발휘하셨다. 당신 자신을 쪼개고, 희생하고, 죽이며 인류 안으로 들어오셨다.

 

   이 쪼개는 마음이 곧 용서하는 마음이요 화해하는 마음이며 사랑의 근본이다.  자기 마음을 쪼개지 않는 사랑은 거짓이다. 

 

   우리는 당신의 몸을 쪼개고 당신 존재를 죽이며 사랑을 보여주신 이 신적인 예수께 기도한다. 하지만 문득문득 그분이 정말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달래줄 수 있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모두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게 해주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세상이 어지로운 것은 나의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몸이 아플 때, 기분이 울적할 때, 용서와 화해가 어려울 때, 나와 가정에 또는 주변에 무슨 일이 생길 때 우리는 그분께 기도한다.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기를 바라며 기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이 평화롭지 못하고 불화로 가득차 있는 것이 우리의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며 더욱 간절히 기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신의 몸 하나 구하지 못한 그분이 우리의 이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

 

   그분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고 모욕을 받다가 마침내는 굴욕적인 십자가 위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시편을 인용하여 "하느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기도하며 부르짖는 소리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당신의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하고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신 그분이 우리의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분이라는 것이, 내가 어려울 때 기도해야 하는 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분께 기도해야 하는가?

 

   여기서 예수의 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의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의문은 더 커진다. "여러분은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야고 4,9) 너무도 뜻밖이 아닌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분께 기도하는 이유는 괴로움과 슬픔에서 벗어나고, 근심 걱정 없이 웃으며 기쁘게 살기 위해서일진대, 야고보는 정반대의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게 말하는 야고보의 의중은 무엇인가? 야고보는 지금 우리를 예수의 고통으로 안내하고 있다.

 

   모든 웃음과 기쁨은 그분의 고통에 동참할 때에만 진정한 것이 될 수 있다.  예수의 고통을 지나쳐서는 진정한 기쁨에 도달 할 수 없다.  그러기에 내가 지금 당하는 고통과 슬픔에만 빠져서는 참되게 기도할 수 없다.  참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당하는 고통과 슬픔에만 빠져서는 참되게 기도할 수 없다. 참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당하는 고통에서 벗어나려 안간 힘 쓰기보다 그분이 당하는 고통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십자가에서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울고 계시는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할 때, 그리하여 예수와 함께 고통당하고 슬퍼하며 울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이 될 때 우리는 진정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이기에.

 

   그분은 고통을 결코 피해가지 않으셨다.  이런 면에서 십자가 아래서 아들의 죽음을 괴로워하고슬퍼하며 비통해 하는 여인 마리아는 기도하는 자의 모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과 하나 될 때, 그분의 고통과 하나 될 때 내 얼굴에 침 뱉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 나는 내 머리에 가시관을 씌워 짓누르고 내 손과 발에 못을 박고 내 심장을 예리한 창으로 찌르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으며, 그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뛰어내려라"하며 조소하는 자, 나를 죽음으로 이끄는 그들을 위해서도 진심으로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도를 바치지 못한다면 나의 기도는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아직 진실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기도는 아직 이기적인 것일 뿐이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한다면 자기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보게 해 달라고, 그들을 그리스도로 대하며 살게 해 달라고,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해 달라고 빌기 위해서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만이 아니라, 행복할 때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지겹고 역겹고 미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세상 안에서도,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저주하는 사람들과 섞여 사는 이 현실 안에서도 하느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나를 저주하고 박해하는 이에게 복을 내려주십사 하고 기도해야 한다.

 

   나를 박해하는 이는 복이 있다고 해야 하는 이 기도는  어쩌면 가난한 이는 복이 있다고 찬미하는 것보다 더 힘들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가난한 이의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재물을 버림으로써 가능하지만,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를 버려야만 한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자기를 희생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참으로 기도할 수 있다.

 

   원수는 복이 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은 복이 있다. 나를 저주하는 사람, 내가 저주하고 싶은 사람은 복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사실은 복 받은 존재임을 당신의 십자가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다. 그들이 자신들의 복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분처럼.

 

 

 

   기도는 삶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르고자 하는 이유는 낭만적인 기도 속에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행복을 느끼고, 위로를 얻으며 눈물을 흘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런 행복과 위안은 상황이 바뀌면 얼마든지 무관심과 냉정으로 바뀔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설혹 십자가의 상황에서도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다. 이 일치가 우리에게 생의 마지막 의미를 준다. 그러나 이 일치는 그분과 하난 되는 기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느님의 힘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만나는 사람들을 달리 보게 될 것이다.  나에게 '잘못한 이'는 누구일까? 그들은 무조건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나쁜 사람, 나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못된 인간인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내가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상처를 주지 않았는데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인간, 나는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았는데 나에게 해를 입히는 인간, 나는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고 화해하려 하는데 나를 미워하고 나를 거부하는 인간, 그래서 나는 그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들은 내가 만든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잘못한 인간을 만들면서 나는 하느님도 때때로 내게 잘못한 존재로 만든다. 용서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의 잘못을 꼬집어 고치려 들거나 그들이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릴 때, 내가 그들 안으로 들어갈 때 가능하다. 용서는 나의 고고한 위치에서 남에게 선사할 수 있는, '그래, 용서해 줄게' 하고 꺼내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용서는 나의 이 고고한 자세를 죽이는 데서 실현된다.

 

   용서는 그래서 가장 흘륭한 기도가 된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용서의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내게 상처를 준 사람, 내 손과 발에 못을 박고 내 가슴을 창으로 찌르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기도이다.

 

   그런데 이 기도가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기도를 되풀이해서 바친다.

 

   주님, 오늘 아침에 기도하였습니다.

   점심때에도 기도하고 저녁에도 기도하였습니다.

   밥 먹을 때도 기도하고 어쩌다 생각나면 또 기도했습니다.

   미사중에 기도한 것은 말씀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하루 종일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모두를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 여전히 미운 사람을 보면 밉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보면 욕을 하며 피하고 싶습니다.

 

   그들 안에서 당신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들 안에서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하고 당신을 내 안에 가두며 당신이 그들을 만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이 제민 사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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