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간 금요일

2011. 2. 16. 오후 6:02:20

글자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독서: 창세 11,1-9
복음: 마르 8,34-9,1
 
독서: 오늘 창세기에서 바벨탑 이야기는 하나로 뭉쳐있는 한 민족을 흩으시어 갈라지게 만드신 이야기다.
 
화답송: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복음환호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다.
 
복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  
         자기의 것을 구하려 하면,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뜻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로 뭉쳐도, 아무리 큰 일을 해내도, 그것은 사라질 인간의 결실일 뿐.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따라 결실을 거두어야 생명의 결실이고 사랑이 된다는 말씀이다.
 
오늘의 말씀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도록 섭리하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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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나바’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삼십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아직도 갓난아이처럼 그의 어머니가 밥을 먹여 주고 대소변을 처리해 주어야 할 정도로 중증 장애인입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잠시도 그를 떠나 있지 못하고 마치 한 몸처럼 움직입니다.
사람들은 그 어머니를 볼 때마다 “‘애물단지’를 안고 사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고 인사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바르나바의 어머니는 정작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장애인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에서 받은 은총이 얼마나 큰데, 왜 사람들이 애물단지로만 보는지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것입니다. 어느새 그의 어머니는 신앙 안에서 자신이 안고 사는 십자가와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지고 사는 십자가가 더 이상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은총이 된 것입니다.

어느 날, 바르나바의 어머니는 ‘복음 나누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르나바가 너무 몸이 아파서 지난주에는 성당에 데리고 가지 못했습니다. 혼자 하는 미사가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갈 때, 바르나바와 함께만 있다면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의 삶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지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삶의 십자가가 없는 것이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운명처럼 지고 살아야 하는 삶의 십자가와 한 몸이 되어, 그 안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며 사는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참된 기쁨과 행복은 이런 사람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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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넘어진 바로 그 곳에서>

 

한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산중에 있는 아름답고 조용한 피정 집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오는 사람마다 다들 부러워했습니다.

“이렇게 수려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사니 기도가 저절로 되겠군. 스트레스도 하나도 없을 것 아냐?”

그러나 정작 그 수도자는 늘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겼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주 불안했습니다. 내적인 평화가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내면의 불안정이 바깥으로 표출되어 얼굴은 어둡기만 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불행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래 가지 않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건, 이웃에 대해서건 지나친 완벽주의였습니다. 나는 매사에 완벽해야 해, 나는 아파서도 안 되, 나는 절대로 실수해서는 안 되지, 이번 행사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어야 해...

틈만 나면 나름대로의 틀, 자기만의 잣대로 자신과 이웃에게 들이댔습니다. 단 하나라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무서운 얼굴로 돌변했습니다. 결국 그의 처신은 자신에게나 동료수도자들에게나 수많은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는 회복불능의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심한 죄책감, 우울증이 뒤따랐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심하게 해치는 완벽주의가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추적해 봤더니 결국 자신의 무능함, 피해의식, 애정결핍에서 기인했습니다.

이런 영적 위기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는 첫 실마리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무능함, 자신의 나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 나의 결핍, 나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과정이 있습니다. 이토록 상처투성이뿐이며, 철저하게도 부족한 ‘있는 그대로의 나’를 하느님께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다 던져버릴 때, 통째로 맡겨버릴 때, 그 순간부터 참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 순간부터 깊은 내면의 자유가 시작됩니다.

이런 쓰라린 작업이 진행된 이후에 하느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우리를 만나러 찾아오십니다. 우리 손을 잡고 일으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지긋지긋하게 우리 뒤를 따라다니는 다양한 삶의 십자가, 때로 바라보기도 싫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 십자가야말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우리의 한계, 우리의 결핍, 우리의 죄, 우리의 실패, 우리의 방황과 실수, 과오...

참으로 묘하게도 이런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진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린 바로 그 곳에서, 우리 자신의 철저한 무능을 절절히 체험한 바로 그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우리와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댓글 2

  • 2011년 2월 18일 오전 6:43

    첨가했음

  • 2011년 2월 18일 오전 9:27

    <수도자이야기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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