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7월 1일은 예수성심 대축일이며 사제성화의 날이었습니다. 홍은 3동의 최승정 베네딕또 신부님께서는 ‘성화’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신부님의 강의는 ‘성화’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였고, 오늘은 그 강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聖化’라는 말은 거룩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사람들은 천상의 세계가 있고, 지상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천상의 세계는 신의 세계이고 거룩하며, 지상의 세계는 사람의 세계이며 세속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상의 세계가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천상의 세계의 거룩함이 흘러와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전’은 지상에 있지만 천상의 것으로 인해서 거룩하며, 성직자도 지상에 살고 있지만 천상의 직무를 수행하기에 거룩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수, 성물’은 지상의 것이지만 천상의 힘에 의해서 거룩하다고 여겼습니다.
거룩함이란 것은 단순히 지상의 것들이 천상의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거룩함’의 또 다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3절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거룩해야하는 구체적인 행위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로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며, 다른 이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천상의 기운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거룩함은 하느님과의 관계일 뿐 아니라, 거룩함이라는 것은 사회적인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마태오 복음 5장 48절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거룩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거룩함이란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일 수 있지만 이웃과의 관계회복을 더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일,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 복음 때문에 희생을 당하는 일,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이 바로 거룩함을 이루는 행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처럼 된 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부정적인 의미는 내 안에 하느님을 몰아내고, 내가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창세기 3장 5절(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 게 될 것이다.)과 창세기 11장 4절(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은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을 잘못이해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내 안의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이제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 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2장 20절) 이러한 삶은 사회의 정의를 이루고, 자신의 희생하며,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께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태석 신부님에게 훈장을 주어야 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태석 신부님께서 거룩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였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또 다른 선악과와 또 다른 바벨탑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어쩌면 지난번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을 통해서 드러난 것처럼 ‘원자력’의 부분별한 이용입니다. 태초에 지구는 40억 년 전에 많은 방사능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같은 방사능 속에서는 생물이 살 수 없음을 아시고 혼돈의 방사능을 없애 주셨습니다. 그 뒤에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방사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생명의 땅을 다시금 혼돈과 죽음의 땅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난자의 핵에 바늘을 찔러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려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듯이 원자의 핵을 파괴해서 에너지를 얻으려하는 것은 죽음의 기운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습니다.
참된 성화라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면서 사회 안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리를 밀어내고 우리가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을 버려버리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聖化’라는 말은 거룩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사람들은 천상의 세계가 있고, 지상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천상의 세계는 신의 세계이고 거룩하며, 지상의 세계는 사람의 세계이며 세속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상의 세계가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천상의 세계의 거룩함이 흘러와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전’은 지상에 있지만 천상의 것으로 인해서 거룩하며, 성직자도 지상에 살고 있지만 천상의 직무를 수행하기에 거룩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수, 성물’은 지상의 것이지만 천상의 힘에 의해서 거룩하다고 여겼습니다.
거룩함이란 것은 단순히 지상의 것들이 천상의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거룩함’의 또 다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3절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거룩해야하는 구체적인 행위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로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며, 다른 이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천상의 기운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거룩함은 하느님과의 관계일 뿐 아니라, 거룩함이라는 것은 사회적인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마태오 복음 5장 48절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거룩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거룩함이란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일 수 있지만 이웃과의 관계회복을 더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일,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 복음 때문에 희생을 당하는 일,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이 바로 거룩함을 이루는 행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처럼 된 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부정적인 의미는 내 안에 하느님을 몰아내고, 내가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창세기 3장 5절(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 게 될 것이다.)과 창세기 11장 4절(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은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을 잘못이해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내 안의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이제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 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2장 20절) 이러한 삶은 사회의 정의를 이루고, 자신의 희생하며,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께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태석 신부님에게 훈장을 주어야 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이태석 신부님께서 거룩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였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또 다른 선악과와 또 다른 바벨탑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어쩌면 지난번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을 통해서 드러난 것처럼 ‘원자력’의 부분별한 이용입니다. 태초에 지구는 40억 년 전에 많은 방사능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같은 방사능 속에서는 생물이 살 수 없음을 아시고 혼돈의 방사능을 없애 주셨습니다. 그 뒤에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방사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생명의 땅을 다시금 혼돈과 죽음의 땅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난자의 핵에 바늘을 찔러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려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듯이 원자의 핵을 파괴해서 에너지를 얻으려하는 것은 죽음의 기운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습니다.
참된 성화라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면서 사회 안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리를 밀어내고 우리가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을 버려버리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