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간 토요일

2010. 12. 18. 오전 8:45:18

글자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소설가 최인호 씨는 소설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신앙인으로도 우리와 친숙한 분입니다. 그분은 예전에 서울 주보에 말씀의 이삭이라는 주제로 3년간 주일미사 해설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분의 글을 많이 읽었고, 그분의 해설은 쉽고 간결했던 기억입니다. 오늘은 그분의 글 중에 ‘큰 바위 얼굴’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은 대접받기를 원하고 스스로 존경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선자라고 질책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두 가지의 '나'가 있습니다. 하나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나'이고 또 하나는 '내 속에 들어있는 나'입니다. 불교에서는 '내 속에 들어있는 나'를 진짜의 나, 즉 진아(眞我)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자기 속에 들어있는 '진짜의 나'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나'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큰 바위 얼굴'에 나오듯 돈을 모으고 권력을 얻고 명예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허상(虛像)이며 허명(虛名)일 뿐입니다. '큰 바위 얼굴'은 어떤 사람이 예언 속의 인물인가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권력을 얻고 명예를 얻어 '남에게 보이는 나'를 드러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존재의 최고 가치는 살아있는 큰 바위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릿돌(마태 21,42)이자 큰 바위 얼굴입니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큰 바위 얼굴과 닮고 싶은 것뿐입니다.” 큰 바위 얼굴은 넉넉하고, 모든 것을 받아 주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조하시고 만든 글 중에 ‘용비어천가’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 중에 “뿌리가 깊은 나무는 아무리 센 바람에도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 열매도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끊이지 않고 솟아나므로, 내가 되어서 바다에 이르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끔씩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의 주장이 옳다고 하기 전에 상대방의 의견을 충실하게 들어주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면 가슴을 움직이게 되고, 그것은 결국 세상의 것과는 다른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언론에 보도 된 것처럼 일부 사제들이 추기경님의 신문 인터뷰 내용을 문제 삼아서 비판적인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교구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긴급 사제회의를 개최하려하였고, 저는 서품 동기 대표로 회의에 참가하려고 하였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이런 회의가 사제단의 일치와 화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고, 회의 자체를 취소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추기경님의 선택과 결단은 마치 큰 바위 얼굴과 같고,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과도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긁으면 부스럼이 되고, 상처는 잘못 만지면 덧나게 됩니다. 큰 바위 얼굴처럼 비도 맞고, 바람도 불고, 눈이 내려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요셉 성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서는 요셉 성인이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약혼한 마리아가 이미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셉은 조용히 파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런 선택만 해도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선택입니다. 마리아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미 진행 중인 혼인을 마음속에 묻고 없었던 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의로운 사람 요셉에게 한 가지 더 요청을 합니다. 파혼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의로운 요셉은 가브리엘의 요청까지도 수락합니다. 이제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큰 바위 얼굴처럼 살아야 합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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