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춘 신부님 사순특강 요약

2010. 3. 24. 오전 6:5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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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신부님께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주제로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신부님의 강의를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성지도는 듣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학생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잘 듣는 것이 영성지도입니다. 결국 영성지도를 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 자비를 체험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것이 영성지도입니다. 살면서 비가오고, 구름이 끼는 것을 보듯이 우리는 주변의 일과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상처는 우리에게 분노와 슬픔을 줍니다.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노와 슬픔은 나 자신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분노와 슬픔은 나를 우울하게 하고, 의욕을 상실하게 하고, 나를 병들게 합니다. 나의 잘못이 아닌데도, 내가 나를 공격하여 참된 삶의 기쁨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런 분노와 슬픔을 이겨내는 것은 다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게는 오래된 사진이 하나있습니다. 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 젊은 부부에게서 받은 사진입니다. 사진은 작은 아기의 모습입니다. 아기는 태어날 때 몹시 아팠습니다. 부부는 제게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주기를 부탁하면서 사진을 주었습니다. 아기의 입에는 수술 후에 숨을 쉴 수 있도록 튜브가 물려있었고, 작은 가슴에는 수술 후에 하얀 붕대로 감겨있었습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엄마의 손이 있었고, 아이는 눈을 떠나 엄마를 바라보고, 엄마는 이제 눈을 뜬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입니다. 아이는 퇴원한 후에 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부부로부터 연락을 받은 저는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아빠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눈을 뜬 아이의 얼굴을 보았고, 한 달 동안 아이와 함께 있었고, 한 달 동안 우리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비록 한 달이지만 아이도 행복했습니다. 하느님 앞에 한 달, 일 년, 백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하느님의 선물에도 감사를 드렸고, 그 선물을 도로 가져가시는 하느님께도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창세기 22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이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은 그 이야기를 듣고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함께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습니다.’(창세22, 2-3) 아브라함은 축복의 선물인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께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성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야기의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복을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번제물로 쓰일 숫양을 주신 것처럼, 우리가 잘못되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오히려 외아들 예수님을 제물로 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 6장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 26 -33) 우리는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를 봅니다. 부모는 아이가 마음껏 노는 것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부모는 아이의 재롱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이가 기쁘고 즐겁고, 신나게 지내는 것이 부모에게 드리는 사랑입니다. 부모는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슬픔, 우리의 아픔, 우리의 고통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자비롭고 사랑이 넘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루가복음 15장의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아들은 재물에 대한 집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하는 참된 기쁨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집착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집착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한문의 父親에서 親은 나무 위에서 서서 바라보는 아버지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부모는 모두 그렇게 나무위에 서서 자녀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보며, 자녀가 돌아오기를 바라보며, 자녀의 기쁨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둘째 아들은 바닥을 쳤습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 얻는 것이 적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들은 뉘우치고, 회개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기억이 있었고, 다시금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아들은 더 이상 자신의 잘못 때문에 비관하지 않아도 되었고, 다시금 아버지의 사랑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까지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자유와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참된 자유와 행복은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착과 포기의 또 다른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부자청년의 이야기(루가18)와 자캐오의 이야기(루가19)입니다. 부자청년은 계명을 잘 지켰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만나서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 부자는 큰 부자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큰 나무위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를 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내가 너의 집으로 가겠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말씀하십니다. 재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빗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와 이집은 구원을 받았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청년에게 하셨던 것처럼 자캐오에게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것은 재물을 포기하는 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재물을 포기하려는 선한 의도입니다. 그 동기의 순수함입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재물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느님께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부자청년과 자캐오의 차이입니다. 자캐오는 적당히 계산을 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런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잠시 기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아무런 분심과 잡념 없이 기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분심이 들게 됩니다. 의식의 행위는 분심이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거나, 좋아하는 게임을 볼 때 우리는 거의 분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의 의식을 잠시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아이가 몰두하기 힘든 것은 의식적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분심 중에 시작됩니다. 분심이 들었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의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분심 중에도 하느님을 찾는 것이 신앙의 여정입니다. 구름이 있어 태양을 보지 못해도 구름 뒤편에 태양이 있는 것을 알듯이, 우리는 시련과 고난 중에도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시련과 고난 속에 있게 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분심 중에도, 시련과 고난 중에도 하느님을 찾는 것이 기도요, 신앙입니다.

12세기에 살았던 베르나르도 성인은 우리의 사랑의 성숙을 4가지 단계로 설명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을 아직 모르는 단계입니다. 나만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하느님을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물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축복을 주시는 분, 자판기와 같은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친구가 되면 우리는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나를 볼 수 있을 때, 참으로 하느님의 피조물로 귀하여 여길 줄 알 때,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는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린 손녀와 할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우물가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을 때, 손녀가 질문을 합니다. ‘할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어디 계셔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물을 보아라! 무엇이 보이느냐? 손녀 대답합니다. 제 얼굴이 보여요. 할아버지 말씀하십니다. 그렇단다. 하느님께서는 그렇듯이 우리들 마음 안에 계신단다.’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을 봅니다. 아기는 넘어질듯 하지만 엄마가 있으니 걸음을 걷습니다. 아이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아이가 넘어지려는 순간 아이의 손을 잡아 줍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습니다. 한손으로는 우리에게 시련과 고난을 주십니다. 그 시련과 고난은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우리에 위로와 기쁨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넘어지려는 순간, 우리를 감싸 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사야 43장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의 말씀이시다.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야훼의 말씀이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건져주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갈 때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가지 못하리라. 네가 불 속을 걸어가더라도 그 불길에 너는 그을리지도 타버리지도 아니하리라. 나 야훼가 너의 하느님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내가 너를 구원하는 자다. 이집트를 주고 너를 되찾았고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주고 너를 찾아왔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그러니 어찌 해안 지방을 주고라도 너를 찾지 않으며 부족들을 내주고라도 너의 목숨을 건져내지 않으랴!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보살펴 준다. 내가 해 뜨는 곳에서 너의 종족을 데려오고, 해 지는 곳에서도 너를 모아오리라.’

참으로 아름다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 때문에 믿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같은 것을 다른 방향에서 보는 것입니다.” 좋은 말씀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신 김동춘 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처음부터 길이 있는 것 같지만, 걸어가다 뒤를 보면 거기에 길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신앙의 여정을 떠납시다!

댓글 1

  • 2010년 3월 24일 오후 12:45

    네가 불 속을 걸어가더라도 그 불길에 너는 그을리지도 타버리지도 아니하리라. 나 야훼가 너의 하느님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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