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것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것을 아름다운 노래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용실에서 일하는 분들을 보아도 부럽습니다. 그분들은 가위로 아름다운 머리모양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자는 경기의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물리학자는 세상의 이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눈을 가지고 있지만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있고,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가 아픈지, 무엇을 먹어야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아이 어머니의 생각이 온통 아이에게 가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을 보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대화중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생각하는 데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의 판단과 저의 생각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서로 말은 하면서도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 또 다른 부담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거였습니다.
며느리가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하는 말들이 가시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매사에 야단만 친다고 생각하는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웃음도 위선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서로가 마음을 열고 보면, 오해가 풀리고 대화가 될 수 있는 것들도 마음을 열지 못하기 때문에 힘들게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同床異夢’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경색되어가는 ‘남북관계’도 그렇습니다. 서로 국민을 위한다는 ‘여와 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오늘 제1독서는 현실의 삶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알코올 중독자가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폭력과 폭언을 일삼던 형제가 온순하게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만과 불평이 가득했던 사람이 웃음을 보이고, 용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사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지 모릅니다.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지 모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사랑의 눈으로 보면, 희망의 눈으로 보면 욕망과 분노로 가득차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만을 추구해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