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가 맡고 있는 일들 중에 ‘서서울지역 교육 담당 사제’가 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이 일을 하였습니다. 이 일을 하기 때문에 주교님께서 보좌신부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1월에는 신년미사를 하였습니다. 4월과 9월에는 영성피정을 하였습니다. 6월에는 지도자학교와 남성 기초단계를 하였습니다. 7월에는 남, 여 총구역장 피정을 하였습니다. 10월에는 남성 구역봉사자 피정을 하였습니다. 매달 남성 여성 지구 총구역장 대표들과 회의를 하였습니다. 지역평의회와 지역 교육 담당 신부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후임 신부님께 제가 하던 일을 맡겨 드렸습니다. 한편으로는 시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습니다. 좀 더 잘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열심히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합니다.
첫째 시간은 공간과 함께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합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우리는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시간은 변화와 움직임을 가능하게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꽃이 피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이 자라납니다.
셋째 시간은 흐름과 역사의 토대가 됩니다.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인식을 갖게 됩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과학 기술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넷째 시간은 우리의 추억과 우리 기억의 창고가 됩니다. 이 창고 안에 우리는 의미, 가치, 보람, 사랑, 기쁨, 슬픔을 담아냅니다. 다른 시간들은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지만 의미와 가치, 보람과 추억, 기쁨과 슬픔의 시간은 오직 인간만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커다란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시간의 창고에 우리는 무엇을 담아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주인공인 것 같습니까? 아들을 사랑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버지, 돌아온 아들에게 잘못을 묻지 않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을 했고, 아버지의 집이 하느님 나라임을 알지 못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잘해 주시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큰 아들이 있습니다.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던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큰 아들과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관심입니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들에 대한 외면입니다. 그것은 잘못한 이들에게 용서와 관용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태도입니다.
작년에 우리의 옆 나라인 일본에 커다란 쓰나미와 그로인한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가 있었습니다. 3만 여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습니다. 40만 여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살아남은 분들은 아직도 고통 중에 있습니다. 북한을 탈출해서 중국에 머물고 있는 탈북자들이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서 다시금 북한으로 보내지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에게 북한으로의 송환은 죽음과 같은 공포입니다. 시리아에서는 반정부 시위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상파 방송인 MBC, KBS, YTN의 기자와 제작자들이 공정방송을 외치면서 파업을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제주도의 강정마을은 폭력과 분쟁의 도가니로 변했습니다. 해군은 기지건설을 명분으로 말 없는 구럼비 바위를 폭파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하느님 나라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집을 나간 둘째 아들들 생각하였습니다. 그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몸은 비록 하느님 나라에 있었어도 마음은 둘째 아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것이 관심이며, 그것이 사랑입니다. 첫째 아들의 마음으로 사는 것은 몸은 천국에 있다 해도 천국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멀리 떨어진 특별한 공간이 아닙니다. 천국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억울한 사람, 정의를 위해서 투신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