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출구

2009. 9. 3. 오전 6:25:08

글자
 


   인생을 살다보면 어렵고 힘든 일은 너무나 많이 있다. 때로는 억울하고 부당하게 피해를 본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이유들을 달아서 그것에 머물면서 스스로의 상처를 곱씹으면서 아파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곤 한다. 이전엔 공부 잘했지만 입시 때 아파서 이 학교에 오게 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학생, 이전엔 잘살았는데 아버지의 파산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학생, 단란한 꿈이 병으로 좌절된 학생 등 학교생활을 하다보면 너무나 많은 상처를 담고서 여기저기서 왜곡된 모습으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을 소외시킨 채 빈둥대는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스스로 자신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던 시간도 길었으니까 그 시간은 어떤 의미에서 삶을 성숙시키는 아픔의 맛을 보는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길어지면 인생을 갉아먹고 삶을 갉아먹어 자신을 상처주고 망가뜨리기까지 한다. 어느 이상 길어지면 지치고 단절감과 소외감 속에서 넘어설 수 있는 출구는 자기 자신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삶을 이야기만 하는 이들을 줄곧 만나게 된다. 이들의 말이 틀린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자신을 직시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지 삶은 살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는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자연의 한 부분인 ‘나’라는 자신은 목숨이 붙어있으니까 사는 것이지 사는데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를 찾아 헤매는 것이 보다 철학이나 종교는 아닌 것이다.

   결국 출구는 자기 자신이 깨달아 현실로 뛰쳐나오는 수 밖에 없다. 억울할 것도 서러울 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 말이다. 살아서 모여있는 사회는 그채로 존재하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그 곳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책임이 삶을 순간순간 지탱해주며 살아가는 것이다. 입을 다물고 살아내기 시작한다. 머물러서 살아낸다. 삶에 관하여 이야기를 멈추고 그저 살아낸다. 그것이 돌파구다.

   명석하고 뛰어난 여자 후배가 졸업후 결혼을 하고 나서 교사로서 일하다가 아이를 낳았는데 청각장애아였다. 그래서 아이를 위하여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아이에게 매달려 키우기 시작하였다. 청각이 부진할 뿐 재능이 있고 뛰어난 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냉혹했다.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 자라서 상승이동 욕구가 강했던 자기세계 확고한 남편은 어느 이상의 교감을 해주지 않았고 이전의 교사로서 미래가 있었던 일류대학 출신의 모범생으로 자라온 자신의 모습은 사라져버리고 청각장애아의 학부모로서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어서 상처받고 우는 아이를 감당하는 자신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지쳐 한국 사회를 떠나버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장애아에게 이 사회가 너그러운 것도 아니고 편안한 곳도 아니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뒷받침 되어주는 것도 아니었다. 정신력 하나로 버텨왔다는 남편은 그렇게 그녀에게 어느 이상 너그러울 수 없었고 자신의 신세를 못견뎌하면서 자신이 희생되어버린 양 피해의식에서 시달리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여자의 일생인 것처럼 자신을 포기하기 시작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아무런 것도 이런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억울할 것이다. 장애아가 견뎌야 하는 현실 속의 억울함을..그것도 재능있는 청각장애아를 키워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얼마나 힘든지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삶이 누구의 삶인가? 누구를 위하여 헌신해왔는가? 그것은 자신의 삶이다. 자기 인생이며 자기 현실이다. 억울한 감정을 넘어선 그채로 삶이란 것을 받아들이고 뚫고 일어서는 것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일이다.

   인격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억울함의 대부분은 넘어서지 못한 미성숙의 표현이기도 하다. 대학교수인 남편은 어느 이상 자신에게 울며불며 괴롭게 하는 자기 아내를 못견뎌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자신의 무능탓인양 생각했다. 충분하게 공감도 안되는 상황에서 그것은 자신의 인생이고 자신이 뚫고 넘어서야 하는 삶이란 것을 그녀가 받아들이려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얼마나 더 많은 상처가 필요할까?  그채로 그녀에게 진통제로 위장된 한이 되어지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삶이 그채로 받아들여지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나 역시 비슷한 심정적인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마치 무슨 시대의 희생물이고, 가정의 피해자이며, 남의 탓인양 돌려대면서 남과 선을 긋고서 고립된 채 삶을 이끌어왔다. 그렇게 보면 그런 부분 없는 것 아니지만 지금 여기서 내 삶이며 내 현실은 그채로 소중한 나의 삶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갑자기 활기가 돌면서 억울함이 감사로 바뀌던 평온함을 기억한다. 이것은 감동에 휘감긴 종교적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담담한 현실이었다.

   다른 이의 도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고마운 만큼만 고마워하고 좋은 만큼만 좋아하는 평온하고도 담담함이라는 것은 정말로 얻기 어려운 일이었다. 늘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자신의 삶을 감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본적으로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것이 때로는 좋은 몫이어도 그러하고 때로는 억울하고 찌그러진 몫이어도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하는 것이다. 모여서 사는 사람들과 더불어서 해야 하는 일들을 해나가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깨치기까지 먼 길을 돌아왔지만 그래서 얻게 된 것은 다른 이들의 모습에서 이 방황과 고뇌로 물러선 어눌함을 발견해낼 때 벗어날 지점을 가리켜줄 수 있고, 기다려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진 이의 좋은 체험이었다.

   삶은 누구에게나 녹녹치 않다. 겉으로는 갖춘 사람들에게도 내면에서는 무언가 갈구하고 무언가 아쉬우며 무언가 아프다. 그런 채로 현실 속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는 사람의 냄새와 온기가 정말로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고 또 느낀다.

   

   

   

댓글 5

  • 2009년 9월 3일 오전 6:41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하는 삶.. 살아냄의 신비..

  • 2009년 9월 3일 오전 7:28

    자라면서 겪는 갈등과 방황함,이후 또 다른 형태의 삶의 숙제. 훗날 감사함에 미소짓는 내얼굴임을 간절히 바라며 하루의 시간과 선택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 2009년 9월 3일 오전 8:56

    고통과 괴로움도 내것으로 즐길수 있는 삶을 살수있게 성모님께 기도합니다.

  • 2009년 9월 3일 오후 4:54

    누구나 자기몫의 고통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우리가 지고가야할 십자가인데...

  • 2009년 9월 3일 오후 7:47

    글속에서 삶의 질박함이, 생의 흐름이, 인간사 윤회가 느껴 집니다.

│ 이 │이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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