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도리

2009. 9. 1. 오전 11:37:36

글자
        학교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만나는 사람들은 주로 학생들이다. 생각보다 깊은 이야기들을 궂이 선생이기 때문에 털어놓곤 한다. 아마 무엇인가 신뢰를 가지고 들어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잘 안하는 이야기들이더라도 교수를 찾아와서는 진솔하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궂이 세상세파에 많이 시달리지 않고서도 다른 사람들의 삶에 끼어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

   작년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은 한 학생이 왕따를 당하면서 생긴 폭행사건이었다. 여학생들만 있었던 학과이기 때문에 누구와 친한가 하는 또래집단의 배타성은 아주 심각한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궂이 집착이 심한 한 학생에게 단체로 학생들이 무시를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원인이 어쨌건 왕따를 당한 학생은 피해의식을 못견뎌 다른 한 학생을 두들겨 패고 머리카락을 한웅큼 뽑아놓은 것이었다.

   어쨌건 문제가 불거진 후 교수들이 나서서 수습에 들어가야하는 이유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한 학생의 학부모가 다른 학생을 고소하겠다고 나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감정의 싸움은 골이 깊어져 미움을 낳고 미움은 그대로 골을 깊이하여 폭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 사건 자체만으로도 학생처에서 처벌을 받아야 할 만한 사항이었지만 나중의 취업을 고려하여 어지간하면 화해를 시도해보자는 것이 교수의 입장이었다.

   사실 이러한 정황에서 한쪽만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드러난 상황에서 폭행을 가한 학생은 이미 감정적으로는 너무 깊은 상처에 신음한지 오래였다. 고등학교 까지 모범생으로 급장까지 지냈고, 다른 학교를 다니다가 와서 나이든 자신이 어느 정도 대접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했기 때문이었고, 친구를 독점하려는 생각에 집착하였던 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자신과 조금 다른 학생을 따돌리고 무시하면서 자신들만의 것을 누리고 완전히 외면하는 배려라고는 조금치도 없는 사적인 집단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으니 혼자서 외톨이가 된 그 학생은 그 원한이 피해의식이 되어 사무쳐있었다.

   정말로 매를 맞고 폭행을 당한 학생은 입원까지 해가면서 자신이 얼마나 아무 죄없이 불쌍하게 두들겨 맞았는가를 주장하면서 그 학생을 고소하여 처벌을 받게 해야한다고 학부모까지 나서서 주장하였고, 가해 학생의 학부모는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식이 한 짓을 전혀 인정할 수가 없었다. 팽팽한 긴장은 줄다리기처럼 한참 지속되었다.

   참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일일런지도 모른다. 가해학생을 처벌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무서워서 학교를 못다닐런지도 모른다는 학생들마저 생겨나니, 정말로 피해자는 피해의식이 되어서 자지러져있는 가해학생 일런지도 몰랐다. 오죽하면 저러랴..싶은 상황이니 말이었다. 사실 명색이 대학이라는 집단에서 얼마나 사적인 또래집단만을 유지하고 지내면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졌을까 싶을 정도로 그들의 의사소통의 단절은 심했다.

   마음을 읽어주고 이야기하는 학과목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일이 삶에 중요하다고 가르쳐주는 선생도 없었다.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학과목에서 가르치기 시작하면 그것은 이미 죽은 지식이 되어버리는지도 몰랐다.

   결국 몇 달간의 줄다리기와 화해의 시도 끝에 학과장이 중재에 나서서 그들은 합의를 보았고 치료비를 물어주는 것으로 처벌도 피하게 되었다. 피해학생의 얄밉도록 수동적인 그 태도는 자신의 고통을 빌미로 상대의 죄를 고발하고 더 처벌해야한다는 주장만을 강화시키는 모습으로 비춰져서 매맞은 채로 자신의 불쌍함을 더 강화시켜가는 것이 또다른 공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러난 공격을 해버린 학생은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면서 합리화하는 이유를 자꾸만 들이대고 어떻게서든지 자신의 폭력행사를 정당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사실 그렇다. 싸움에도 도리가 있다. 이기는 자는 처절하게 상대를 짖밟아서 상대를 비참하게 망가뜨리지 않아야 하며, 지는 자는 처절하게 망가져서 상대를 극악한 자리에 서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이지만 그 도리가 생각났다. 어린 학생들에게 자신을 제어하면서 그런 도리를 납득하라고 이야기해줄 용기가 있었을까? 그 이야기를 하면 그 아이들은 알아들었을까?

   왕따는 중고등학교에서도 벌써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다. 약하고 결함이 있으면 감싸주고 돌보아주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고 상처를 주는 그 잔인함은 인간의 본능에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나서 사람이 되라고 교육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외우고 밑줄 긋는 교육을 받아서 자격증을 따고 취업을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곁에서 한 마디 해줄 사람은 어디 있는가?  그런 의사소통이 중요하고 삶의 모범이 되어주는 사람은 어디 있는가?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늪인지 노래가사처럼 아무도 정말로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학년이 바뀌고 그 가해학생을 벤치에서 만났다. 말을 걸었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나름대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있었다. 너무나 오래 미움에 갇혀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노라고 화장도 곱게하고 자신의 인생을 위하여 여러 가지 꿈을 펼치고 있었다. 현실 가능한 차원에서 채워넣으라고 말해주었다. 홀가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채로 그 학생은 아주 작은 언덕 하나를 넘어선 듯한 모습이어서 안심되었다.

   피해를 입고 마냥 그 학생을 처벌해야 한다고 입원까지 하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던 피해학생은 정말로 그 사건으로 해서 피해를 입었다기 보다는 자신의 가정환경의 피해자기기도 한 것 같았다. 맞아서 많이 아팠을 것이다. 머리도 뜯기고 코피도 났었으니까.. 그러나 절대로 자신은 잘못이 하나도 없는데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그분이 저를 때리셨다는 그 유창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내 기분이 왜 그렇게 씁쓸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세상에 잘못하고 사는 사람은 많다. 서로 그러하다. 그러나 자신이 너무 옳아서 하느님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용서하지 못할 뿐이다. 도리에 맞추어 싸움을 하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적어도.. 최소한은 서로를 극한으로 몰아넣으면서 살지는 않았으면 한다. 

    

 

댓글 2

  • 2009년 9월 1일 오후 3:29

    의사소통의 단절, 배려하는 마음이 없음이 안타갑습니다.

  • 2009년 9월 2일 오전 5:00

    진정한 교육이 없는 한국의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라 씁쓸합니다. 저는 제 자식에게 어떻게 모범을 보이고 살아야 하는 것이진..

│ 이 │이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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