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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가이들이 자신들의 주장이
사리에 맞다는 식의 이야기를 꺼내며 예수님께 논쟁을 걸고 있습니다.
많은 특권을 가지고 현세적 성공을 중시하며 영적 실재에 냉소적이던
사두가이들의 태도는 우리 현대인에게도 익숙한 모습일 것입니다.
사실 많은 학자와 사상가가 물질주의, 회의주의, 자연주의, 과학주의,
환원주의 등과 같은 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비롯한 세계관을 표현해 왔습니다.
이러한 현대의 사조는 각 개인의 가치관과 행위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신들이 자초한
‘신 없는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세계관이나 생로병사의 자연법칙에
종속된 인생관에 따라 부활과 하느님 나라를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부활한
이들은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학생 때 철학 교수 신부님이 이 복음을 말씀하시면서,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고찰하라는 네덜란드의 근대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을 언급하신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복음에 대한 또 다른 ‘철학적 주석’을 본다면,
영국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다음과 같은 명제일 것입니다.
“세계의 의미는 반드시 이 세계 밖에 있어야 한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사두가이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의 질문 내용이 아니라 그들 삶의 자세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가치와
초월적 차원의 삶에 대해 눈뜨는 것을 시작부터 막고 있는
선입견, 결코 변하지 않겠다는 완고함과 자기방어의 의지가
그들의 자세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철학자가 아닌 스피노자나 비트겐슈타인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고 초월적 세계에 대한 영감을 얻는 것은,
그들이 지닌 ‘더 큰 진리’에 대한 개방성과 열정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부활이 뜻하는 초월적 세상에 대한
정신의 눈을 밝히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기에, 신앙인들은 어쩌면
모두 철학자의 모습을 한 조각씩 간직한 가운데 살아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가슴속에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진지한
의문들이 아니라 냉소적이고 완고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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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 미사-
♬ 살아 계신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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