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1 주일미사
철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남편이 있었답니다. 이 남편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지를 깨닫게 된 것은 아내가 이렇게 묻던 날이었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나를 왜 그토록 사랑해?” 그러자 남편의 말이 총알처럼 되돌아 왔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토록’ 이란 단어는 강도가 세기를 말하는 거야? 아니면 깊이나 빈도나 지속성을 이야기 하는거야?” 순간 멍~하시죠? 장미꽃이 아름답다고, 장미 꽃잎 하나하나를 잘라서 모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사랑은 무질서한 면이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따지거나 분석하지 않으니까요.
오늘 복음에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 온갖 정성을 다해 발을 닦고, 입을 맞추고, 향유까지 붓습니다. 그러자 집 주인인 바리사이는 이렇게 읊조립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요. 이미 바리사이는 그 여자의 전력(前歷)을 문제삼고 분석을 끝냅니다. 그에게 그녀는 만나면 안 될, 아니 마주치면 안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과거’ 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하나하나에 메어있는 사람은 큰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면 ‘이 사람은 이래서 안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됩니다.’ 좋지 않은 하나하나를 잘라내다보면 남는 것이 없지요.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의 자세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정성을 다해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예수님 마음에 들까? 들지 않을까? 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조금 귀찮으실 수도 있고 이 여인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성을 다합니다. ‘속죄를 할 수 있다면...’ 하면서요. 이런 자세를 가졌기에 그녀는 최고의 찬사를 듣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즉 ‘너의 이러한 자세가 하늘의 감동을 이끌어 내었구나’ 하는 말과 같습니다.
여기에 우린 두 가지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음을 알고 잘 뉘우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뉘우치는 이에게 매정하게 굴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나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여기에 욱~하는 성격도 한 몫을 합니다. 하지만 뉘우치는 이를 잘 받아주고 일으켜 주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