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금요일

2013. 3. 29. 오전 10: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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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간 금요일.

사람이 살면서 이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느껴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든 이것을 떨쳐버리려고 듭니다. 그건 바로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 외로움을 없애기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원칙보다는 친분관계를 더 앞세우며, 모든 일을 인간적으로 해결하려 듭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외로움, 이 고독은, 나 자신을 제대로 만들어 주는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것에서 벗어나려고 하다보니 이것의 참 정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2천년 동안 많은 수도자들이 그렇게도 침묵에 대해 강조를 했나봅니다. 그 외로움의 정체는 ‘나’ 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해 주는 시간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오늘 주님은 많은 군중 속에서 홀로 덩그러니 남겨집니다. 그동안 예수님과 관계를 맺었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분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 빵을 얻어먹었던 사람들, 그분에게서 악령과 병이 고쳐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싹 닦아버린 느낌입니다. 게다가 너무나 억울합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데, 죄를 지은 것인 양 몰아가는 사람들의 말이, 너무나 분통 터질 법도 한데 당신은 가만히 계십니다. 이미 우리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당장 악다구니로 화를 내 봅니다. 나름 준비한다고 변호사를 만나고 소송을 걸어 어떻게든 이겨보리라는 안간힘으로, 이제 나에게는 승리만이 필요하다는 태도로 나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러지 않고 침묵 가운데 가만히 계십니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먹어가면서, 사람은 품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장 내 주머니에 한 푼이 없어도, 다른 사람들이 날 대접해 주는 맛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내심 기대를 합니다. 그러면서 남들에게 서비스를 받을 때,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우리가 가진 허망한 기대로 인해, 얼마나 가슴이 아팠습니까? 가족에게 친지에게 ‘이 정도는 나한테 해줘야 하지 않아?’ 하는 기대심이 서로를 얼마나 멀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덩그러니 남겨져, 대접받지 못했다는 사실의 서운함으로 얼마나 나 자신을 들들 볶아댔습니까?

  오늘 당신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합니다. 1독서에도 나옵니다.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그 분은 예전 우리가 알던 그 모습이 아닙니다. “우러러 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만한 모습도 없었다.”는 말씀처럼, 이미 주님의 모습을 보고 난 사람들의 표정은, 실망감과 비애가 교차됩니다. 철저하게 무너지고, 철저하게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보면서 우린 이것 하나는 기억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건 바로 잘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그것이 아니라면서 안간힘을 쓰면서 부정하다가 추잡해지기보다는, 묵묵히 받아들이고 다음을 기약하는 자세를 말입니다. 우린 이 신앙을 통해 약속 받은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영원한 생명’ 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의 모습은,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기보다, ‘지금 여기에서의 생명’ 만을 원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요.

  우린 이 다음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그분은 다시 부활 하셨지만, 흥미롭게도 못자국의 상처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행복하게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하지만 나는 내 상처만 보면서 우울해 합니다. 이것이 상처를 보는 태도의 차이인데요. 이미 주님이나 우리나 상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상처를 끌어안으며 행복하게 다음을 걸어가셨고, 우린 여전히 상처 안에 갇혀 살고 있는데요. 그 분의 외로운 수난과정을 보며 나도 앞으로 어떻게 가야할 지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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