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4주 금요일. 지혜 2,1-22;요한 7,1-30
주보의 중간 뒤편을 보시면 글자가 빠곡하게 편집된 난이 있습니다. 모집광고도 나오고, 무슨무슨 안내도 있고요. 어떠어떤 기도모임도 있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작은 갈망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기도를 잘하고 싶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하고 싶다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 어떻게 잘하고 싶은 것인지는 본인도 잘 모릅니다. 아마도 ‘지금보다야 낫겠지’ 하는 막연함에서 보통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곳에 가서 기도방식을 듣고 따라 해보는데, 지도자는 자꾸만 그게 아니랍니다. 지금처럼 하는 것은 기도라 부를 수 없고 ‘머리로만 하는 것’ 이랍니다. 즉 주님이 오셔서 나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머리로 지시하여 내놓는 기도랍니다. 다시 준비해서 기도한 것을 면담해 봅니다. 그런데 또 아니랍니다. 그건 실제의 내 모습이 아니라, 뭔가 덧칠한 화장하고 분장된 나의 모습이랍니다. 정직하지 않는 것이랍니다. 기도를 배우러 갔다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짜증도 밀려옵니다. 나는 노력을 한다고 했는데 자꾸 지도자는 아니라는 말만 하니까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중간에 서 버린 느낌인데요.
오늘 독서 말씀이 그런 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지요. 수영을 배운 사람이, 수영을 익히면 몸이 물에 뜨게 된다고 아무리 말을 해준들, 계속 몸에 힘을 주는 사람에게는 몸이 뜬다는 말은 그저 먼 나라 이야기입니다.
그저 어슴프레 하게, 대충 ‘그게 그런 것이지’ 하며, 어림짐작을 하고 사는 신앙인들이 실질적으로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뜻하신 바를 진정 알기 위해서는 나의 것을 내려놓고 우선 그분처럼 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 정도까지만 할래요.’ 하는 사람은 결코 주님이 원하신 그 세상을 보지 못합니다. 본인의 한계를 너머서는 자세를 만나고픈 사람에게만 새 세상이 열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