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4주일 미사.여호수아5,9-12;2고린5,17-21;루카 15.1-32
찬미 예수님. 교우 여러분 일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인간관계에서 오해없이 잘 지내고 계십니까?... 일단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시작하였지만,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실상은 오해하고 산다는 사실을요. 마찬가지로 하느님에 대해서도 오해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오해하는 것들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일단 하느님의 표현 방식은 사람처럼 직접적이지 않습니다. 대신 표징을 보이십니다. 그런데이 표징은 실제적이죠. 그저 안 보이는 이념이나, 공(空) 사상이 아닙니다. 실제적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하고 사셨으니까요. 역사에 한복판에 오셨다는 건, 실제, 리얼이죠. 그리고 가끔 찾아오는 행복을 통해서도 내가 직접 체험을 합니다. 행복은 이념이 아니지요. 느낄 수 있으니까요. 또는 천재나 위대한 인물, 성인 등을 세상에 내 주시면서 그들의 입과 행동을 통해 하느님의 사상을 보여주십니다. 그야말로 이것도 실제적이죠. 하느님의 표현은, 단지 안 보이는 허공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걸 잘 모르고 살았습니다. 당장 내 소원이 안 들어줬다고 불만을 품거나, 내 맘대로 쉽게 일이 안 풀렸다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침묵에 대해 답답해 하였습니다. 당신의 표현방식은 우리와 처음부터 달랐는데도 말이지요. 그 표현방식이 나와 달랐다고 여겨서 어떻게 행동으로 옮겼습니까?
그렇습니다. 떠났습니다. 둘째 아들처럼, 몇 주 성당에 안 나온다던지, 일부러 계명과 반대되는 삶을 살던지 하면서요. 또는 첫째 아들처럼 했습니다. 몸은 교회에 있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듯 보였습니다. 허나 나의 내부에는 계속 갈등이 있었습니다. 뭔가 모를 불만으로 가득했습니다. 자~ 첫째 아들은 자기 생각을 감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비겁자였고, 둘째 아들은 자신의 불만을 우선 터뜨리고 저질러보는, 뒷생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린 이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지요. 비겁하기도 하고, 생각이 별로 깊지도 않고요. 아들 둘이 모두 아버지를 오해했던 겁니다. 그럼 이 오해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시랍니다. 그런데 나는 100년도 못 사는 유한한 사람이지요. 처음부터 둘의 출발이 다릅니다. 그런 내가 그분의 계획과 섭리를 다 알고 이해한다? 이건 교만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분은 사람처럼 말로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헤아려야 합니다. 그 뜻이 뭘까? 하고요.. 성모님이 그러셨다죠? 당장 벌어진 사항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이렇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으로 깊이 헤아렸다.” 성경공부도 그렇습니다. 처음 성경 읽을 때, 쓰여진 그대로 바로 이해되던가요? 아닙니다. 행간에 숨어있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쓰여진 역사배경도 알아야 하고요. 이렇게 성경도 잘 못 알아듣는데, 하느님은 더 말할 나위없이 오해하고 살았습니다.
이제 하느님에 대해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학생에게는 악몽 같겠지만 ‘시험’ 이 나의 현상태를 알려주고요. 어른들은 ‘건강검진’ 이 나의 건강상태를 알려줍니다. 마찬가지로 내게도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점검할 수 있는 장치’ 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갖고 있는 점검장치가 있습니다. 그건 ‘기억’입니다. 이 기억은 1차와 2차적으로 봐야 하는데요. 1차적으로는 ‘하느님에게 무엇을 받았는가? 무슨 선물을 받았는가?’ 를 살핍니다. 이 선물받음을 아는 것이, 내가 그분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선물을 받았는데, 또 다른 선물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야말로 개콘의 갸루상처럼 ‘사람이 아니므니다.’ 남녀 관계도 그렇습니다. 잘 만나주지도 않으면서, 또 다른 선물만을 기다리는 여자에게 결국 날아오는 것은 이별통보이지요. 이게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2차적으로, 여기서 진짜 봐야할 것은 사실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은 그저 ‘매개체’ 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선물을 통하여 관계를 맺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린 ‘선물’ 만을 원했습니다. 여기서 관계의 시작은 어그러졌던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람과의 관계의 시작을 다시 돌리고 회복하는 것이, 이 사순기간에 해야 할 일입니다. 단지 받고 싶은 선물에 애쓰기보다, 선물을 통하여 주님과의 믿음의 굳은 관계로 되돌아 가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지향점이기 때문입니다.
